아빠 유치원 9
몇 달 전, 처음 했을 때만 해도 아빠는
선으로 긋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가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셨다.
계속 연습해서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하실 수 있게 됐을 때,
그다음에 우리가 도전했던 것이
점으로 연결해서 그리기 활동이었다.
색연필이나 펜으로 점을 찍으면
아빠의 손에는 쿠션감이 적을 것 같아
면봉을 스탬프잉크에 찍으면서
콕콕 찍으시게 했다.
아빠랑 제일 처음에 면봉으로 찍었을 때만 해도
잘 되지가 않아서 중단했었는데,
점점 매끄럽게 동그라미를 콕콕 찍으셨다.
그 손을 보는데 뭉클한 기분이 들어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 순간의 동그라미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던 동그라미였다!
동그라미를 점점 잘 해내시기에
"아빠! 우리 세모도 네모도 그려요."
라고 말씀드렸고,
아빠는 허공에다 대고
세모와 네모 그리는 연습을 하시더니
그것도 모두 성공하셨다.
선으로 그리는 것도 잊으셨던 아빠였는데,
점으로 찍어서 완성했으니 이쯤 되면
소리 질러야 되는 거 아닌가.
옆에서 내가 손뼉 쳐드리면서 감탄사 퍼부어드렸다.
아빠는 어깨가 으쓱으쓱!
나는 옆에서 꺅꺅!
신났다. 둘이서!!!
점으로 찍은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색칠하시게 하고,
나는 잠깐 엄마랑 얘기하고 왔다.
학구열 높은 아빠는 그 사이에
색연필로 동그라미, 세모, 네모들을
더 많이 그려놓으셨지 뭔가.
세상에!
아빠는 그림 그리기를 하시면서
점점 우등생으로 거듭나시는 것 같다.
이렇게 한 번씩 스스로 해놓으신 것을 보면
우리의 놀이가 긍정적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많이 그려보았으니
이번에는 면봉으로 아빠가 그리고 싶으신 것을
그려보시라고 했다.
그랬더니 점도 콕콕 찍으시고,
선도 찍찍 그어가면서,
아주 큰 네모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그리셨다.
그려 놓은 것이 무엇인지는 설명을 못하셨다.
그래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완성해 보자고 말씀드렸다.
색연필로 색칠해 보시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아빠는 색칠도 열심히 하셨다.
주황색 테두리를 보니까 이걸로 시계를
완성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면 숫자 쓰기도 동시에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선반 위에 놓인 시계를 가리키면서
"아빠, 우리 저 시계처럼 숫자 들어간 시계를
그려봐요."라고 했다.
내가 숫자가 들어갈 자리를 표시하고
숫자는 아빠가 직접 쓰시도록 했다.
일단 쓰기 연습을 먼저 한 후에,
12, 3, 6, 9를 먼저, 나머지 숫자들도
천천히 다 채워 넣으시도록 했다.
시계 그리기 덕분에 1부터 12까지
숫자쓰기 놀이가 된 시간이었다.
드디어 주황색 테두리의 시계도 완성!
그날은 아빠의 컨디션이 최고인 날이었다.
아무래도 아빠의 컨디션이 좋았던 것은
그날의 외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엄마, 아빠와 나는 셋이서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그날은 아빠가 길에서 좀 많이 걸으셨기 때문에
평소보다 운동이 많이 됐을 것이다.
치매가 되신 이후로 아빠는
다리 근력도 예전 같지 않으셔서
갑자기 휘청하실 때가 많으시기 때문에
팔을 잡고 있어야 한다.
신호등 앞에서 그냥 막 걸으시려 하고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해서 조마조마하다.
아빠랑 나랑 키높이가 안 맞아서
팔을 잡고서 같이 걷다 보면
내 몸이 기우뚱해 있는 상태라서 힘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잘 나갔다 왔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아빠는 매번 컨디션이 달라지신다.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기에
그날의 아빠 컨디션이 좋으실 때
한 가지만 더 해보기로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하트랑 별을 그릴 수가 없으셨는데
이젠 혼자서도 그릴 수 있으시다.
하트도 점으로 콕콕 찍어서 그리시게 했다.
근데 조금 해보시더니 힘드셨는지
하트와 별은 그냥 선으로만 그리셨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점이든 선이든
다시 별을 그릴 수가 있게 된 것만도 좋았다.
하나의 하트와 하나의 별이 완성된 후에
너무 기뻐서 한 번만 더 해보시라고 했고,
대각선으로 같은 모양을 하나씩 더 그리셨다.
"아빠! 저 이제 집에 가야 하니까
하트랑 별이랑 한 번만 더 그린 후에
예쁘게 색칠헤주세요"라고 했더니
아빠는 무슨 색으로 하냐면서 갑자기 당황하셨다.
그냥 아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더니
세로 방향끼리 같은 색으로 칠해놓으셨다.
주황색 하트는 사랑이 넘치다 못해
오동통한 하트가 되었다.
난 꼭 복숭아를 보는 것 같았다. ㅎㅎ
늘 이렇게 아빠의 상태가 좋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특히 더!
내가 최근 몇 달 동안에 가장 잘한 일이
이렇게라도 아빠와 함께 노는 시간을
꾸준히 가졌다는 것이다.
손 좀 움직인다고
뭐가 대단히 좋아지겠나 싶었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해내실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걸 보며,
되든 안되든 일단 해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별거 아닌 작은 놀이였지만 이런거라도 하길 정말 잘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아빠는 내 이마에 뽀뽀를 해주시고
나는 아빠를 꼭 안아드렸다.
"아빠!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아빠는 내가 탈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때까지
현관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시고
계속 나를 보며 서계셨다.
손을 흔들어주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