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친숙한 공간

두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다

by 고스란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 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빰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 <잠든 하녀 A Maid Asleep>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A Maid AsleepJohannes Vermeerca. 1656–57 / <잠든 하녀>, 페르메이르


<나는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p.47





난 메트(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애칭이란다, 아직 애칭으로 부를 만한 사이가 아니지만 이름이 길기도 하고 좀 더 애정 어리게 보겠다는 의미로 나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 가 본 적이 없다.


대신 이 책으로 메트의 그림을 보고자 했다. 메트 전시물에 대한 다양한 책이 있지만 고요의 시간을 통과하며 약 9천 명의 그림 속 주민과 눈 마주친 작가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내가 메트에 가봤다 해도 이 어둑하고 눈에 띌 것 하나 없는 그림을 지나쳐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책을 읽다 그런 그림이 있었냐며 홈페이지에 가서 검색해 봤을 것이다.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 속에는 수많은 그림이 거론될 거고 어차피 모든 그림을 같은 무게감으로 볼 수는 없다. 이 그림은 문장에 꽂혀 찾아본 그림이다. 문장이 주인인 셈이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페르메이르가 포착하고 그린 것이 놀랍그 느낌을 패트릭 브링리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데 감탄했다.






우리의 신비로운 눈은 생각에 따라 자유자재로 줌인 줌아웃을 한다.

가끔 내가 본 이 장면을 그대로 카메라로 담고 싶어 확대도 해보고 광각으로 찍어 봐도 형편없는 내 사진 실력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이걸 그림으로라도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조차도 안 되니 그저 몇 마디 마음에 담아놓고 흘려보낼 뿐이다.

글이라도 남기겠다고 알맞은 단어를 머릿속에서 뒤지고 뒤져 찾아내 보지만 평소 정리되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쌓인 저 구석까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찾는 게 귀찮아서 하다 마는지도 모른다. 아쉬운 대로 쓰던 단어를 툭툭 털어 다시 사용할 뿐이다.




내 친숙한 환경 중 눈이 시간을 내어 머무는 곳은 내 방과 산책길이다.

하나는 완전히 개인적이고 폐쇄된 공간으로 변화라곤 내가 만지는 것이 다인 곳이다.

다른 하나는 공적이고 개방된 공간으로 자연이 매 시간마다 매만져 변화하는 곳이다.


멍하니 방에 앉아 혹은 누워 한두 곳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몇 평밖에 안 되는 공간이 무한히 펼쳐진 우주가 된다. 바로 장대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현재를 느낄 수 없는 그 순간 나의 생각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나를 쥐락펴락 한다.


주로 해질 무렵 산책을 떠나면 모든 순간이 새롭다. 어느 것 하나 멈추거나 머물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 해, 달, 구름도 변하고 심지어 돌도 흙도 변한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말이다. 마침내 성스러움에 이른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귀함과 고결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친숙하다는 건 친하고 익숙하여 허물이 없다는 말이다.

나랑 친해지고 같이 여물어 잘못이나 실수조차 다 덮어줄 수 있음을 뜻한다.


나의 친숙한 공간은 엄마의 뱃속과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