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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양귀비가 아니더냐

눈부시게 빨간

by 고스란

봄이 지나 슬슬 더워지니 이른 봄꽃은 지고 활개를 치는 꽃들이 많다.

개망초가 그러하고 금계국이 그렇다. 담장에는 빨간 장미가 자기를 꺼내달라며 탐스럽게 피어있다.

들판의 하얗고 노란 꽃 사이에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눈이 부시게 빨간 꽃이 보인다.

얇은 꽃잎 몇 장이 아슬하게 넓게 펴지는, 떨어지는 화분을 받아내다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젖혀지는 꽃이 있다.

그 이름조차 귀한 양귀비다.


퇴근길 공터를 텃밭으로 가꾼 길가에 몇 송이의 양귀비가 피어 있었다.

빨간 양귀비는 눈을 감고 다니지 않고는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장미도 빨간 꽃의 대표이자 오월의 여왕이지만 분명 다른 매력이 있다.

이름이 그래서일까 매혹적이고 고혹적이다.

안타깝게도 난 양귀비의 매력에 이끌리진 않나 보다.

몇 번을 봤어도 사진을 찍게 되진 않았다.




그저께 우리 집 주차장 기둥 바깥쪽에 고개를 숙인 채 털로 덮여 있는 꽃봉오리 몇 개를 가진 못 보던 풀이 보였다.

처음 보는 풀이었다. 이건 뭔데 여기 있나 싶었다.

어제 아침이 되자 고개 숙여 감추고 있던 봉오리가 밤새 애쓰며 꽃을 피웠다.

그 바쁜 출근길에도 사진을 안 찍을 수가 없었다.

근처의 회색빛의 돌과 차를 배경으로 어울리지 않게 강렬한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저녁 무렵에 그제야 꽃을 발견한 아들이 놀란다.

"엄마, 이거 양귀비 아니에요?"

"맞아."

"이거 마약인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워워~ 아니야, 이건 양귀비 꽃이야 그냥 관상용이야."




풀꽃이다 보니 오늘 아침에도 그 자리 그대로 피어있다.

어제는 약간 오므린 모습이었다.

오늘은 꽃은 살짝 더 커지고 수술은 빽빽하고 화분이 살짝 날려 새빨간 꽃잎을 얇게 덮고 있었다.

가까이 꽃을 찍기에는 조금 지저분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꽃은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있는데 보기에 덜 이쁘다고 말하는 내가 민망했다.

가장 바깥 꽃잎은 살짝 젖혀 있다. 새빨갛게 활짝 핀 모습이 아주 려하다.



양귀비를 보는데 어제의 놀람과 약간의 어색한 감정이 아니었다.

무슨 감정인지 차를 타고 아들을 기다리며 생각해 보았다.


"너는 어디에 피었든 양귀비구나."


얼굴에 미소가 확 번졌다.

너는 나에게 이걸 알려주려고 집 앞까지 와서 피어있구나. 네가 고생이 많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무슨 풀꽃이 나에게 뭘 알려주겠다고 왔겠는가 씨앗이 어찌어찌하다 날려온 게지.


근처 꽃이 자라기 좋은 흙이 가득한 장소가 많다.

사람들의 발길이 있으나 보호가 되는 장소도 있고, 발길이 드물어 마음껏 자랄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고 흙도 거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도 있다.

하필 보도블록 사이에 싹을 틔어 지붕에서 받아내리는 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는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에 있든 어떻게 피었든 '양귀비'이듯 우리도 그러하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든 '나'임은 변함이 없다.

조금 더 불편하고 척박할지라도 그 특별함과 고귀함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설 자리가 아닌 곳에서 꽃을 피우니 꽃밭의 여러 꽃 중 하나일 때보다 눈이 더 간다.

사진을 찍고 싶고 더 자세히 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이런 순간을 누구나 만난다.


어디서든 피어라.

나답게 피어라.


언제나

고귀한 나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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