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에 대한 태도
20대 첫 직장에서 만난 동기가 있다.
그때도 관리자로부터 박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뭐든 척척 해내는 그녀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늦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올해 나에게 모임을 소개해줬는데 그 모임에서 나가야 될 거 같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모임 규모가 크고 각자 소모임 활동을 하고 있기에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으나 소개해주고 나가는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긴 대화 끝에 마음은 조금 풀렸고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囊中之錐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才能)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
그녀는 낭중지추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엄마로, 아내로 다양한 역할에서 남다른 성과를 낸다.
한 해에 한두 번씩 만나며 20여 년을 지켜보니 그녀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다.
물론 만만한 삶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그녀는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종종 겪는다.
그녀는 몇 번이나 데어보고서도 불나방처럼 달려든다며 스스로 어리석다고 한다.
그렇게 했기에 그녀는 그 뜨겁고 밝은 중심에 서 본 것이다. 가본 자만이 아는 경험치를 얻은 것이다.
그에 반해 난 스스로 아웃사이더이자 소수의견자라고 생각한다.
누가 밀어낼 필요도 없다. 중심으로 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중심에서의 환희와 희열도 모르지만 어려움과 괴로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양끝에 있는 것만 같은 두 삶에 우열은 없다.
타고났든 환경 때문이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삶을 살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우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때 관심의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관심이 간다면 다시 감정의 두 갈래가 생긴다.
부러움과 질투다.
사전적 뜻과 학문적 의미를 떠나서 아주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구별법이 있다.
내가 이 둘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언제,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살면서 꽤 오랜 기간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을 들여다보며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좀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하여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어떤 영역에서든 나와 차이가 나는, 나보다 나은 한 사람을 떠올려 본다.
가상의 높낮이가 생기고 내가 상대를 올려다보게 된다.
먼저 그 높낮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수용한 후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상대의 자리로 올라가고 싶고 노력하고 싶다면 부러움이다.
반면 상대를 내가 있는 자리로 끌어내리고 싶고 그가 더 올라가지 못하길 바란다면 질투다.
가끔 하는 '부러우면 지는 거'란 말은 단편적인 표현이다.
여기에서 부럽다는 것은 상대가 나보다 나음을 안다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로 승패를 가른다면 내가 지는 것이 맞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내 마음가짐이자 나의 선택에 따른 행동이다.
둘 중에 한 명을 움직여야 한다면 어느 쪽을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을까?
거기선 대답이 쉽다. 바로 나다.
내가 남을 움직이기엔 힘도 들고 변수도 많다.
하지만 나를 움직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가 못하는 것은 결과를 만드는 것뿐이다.
내가 나를 움직여도 결과가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내가 남을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그 결과가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괜스레 남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려고 애를 쓰지 말자.
그 에너지로 나를 움직이자.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 부러움을 표현하자.
나의 성과를 인정하고 부러움까지 표현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에겐 감사와 도움의 마음이 일어난다.
만일 나를 무시한다면 내가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니 관심에서 제치면 된다.
나이가 들면 만난 사람의 총량은 늘지만 오히려 내 사람은 줄어든다.
고맙게도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에 낭중지추가 여럿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축하하고 부러워하며 덕분에 나도 시나브로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낭중지추라서 상처받은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
화려하지 않지만 포근한 주머니로 그 뾰족함을 안아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