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주세요, 그래야 위로가 될 거 같아요
하필 한국과 바레인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다.
축구 덕후까진 아니더라도 축구를 꽤나 좋아하는 아들과 살다 보니 웬만한 볼 수 있는 시간 대에 하는 경기는 거의 다 본다. 특히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김민재까지 나오는 경기인데 볼 수가 없다고 하니 더 서운하다.
8시가 되자 남편과 아들을 자기 먹을 것을 챙겨 슬슬 TV앞에 자리를 잡는다.
나도 먹을 것을 챙겨 노트북이 있는 다락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때보다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자리에 앉아 줌수업 링크를 찾으면서 생각을 비우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 줌수업은 정리컨설턴트의 무료 특강이다.
정리
일을 하고 먹고사는 데 지장을 줄 정도로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들어오면 한숨이 나오고 흐린 눈으로 쳐다보고 싶을 정도로 잘 못 한다.
처음엔 내가 몰라서 못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안다고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동안 한 번도 안 배운 것이냐? 그럴 리가 없다.
책도 여러 권 읽었고 다른 미니 특강도 들어봤고 챌린지에 참여도 해 봤다. 하지만 아직도 내 삶에 들어오지 못했다.
정말 다행인 건 정리를 못 한다고 서러울 만큼 나에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대신 불행인 건 나만큼이나 정리에 관심이 없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산다.
정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남편이 매일같이 정리하며 잔소리를 하는 통에 괴롭다는 친구의 이야기마저 부럽게 들릴 때가 있다.
정리는 마음의 문제이자 의지력의 문제고 시간과 기술이 필요한 거라 말한다.
내가 정리를 못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의지는 약하고, 다른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려 시간을 내려하지 않고 기술도 없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축구관람을 포기하고 한 시간 반이나 시간을 내서 배운 바가 있었으니 글로 적어 두고 천천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정리 못 하는 집이 꼭 갖고 있는 물건, 정리 못 하는 사람들이 하는 변명. 안타깝게도 모두 내 얘기다.
정리는 비운 후 채우는 것이라는 기본을 기억해야 한다.
비움을 실천하는 세 가지 공식이 있다.
매*조*꾸
매일 - 매일 하는 일의 앞뒤 시간에 붙여하는 것이다.
조금 - 알람을 15분 정도로 맞춰놓고 집중해서 한 후 다 끝내지 못해도 미련 없이 멈춘다.
꾸준히 - 하루 15분 정리한 걸로 만족하고 하는 동안은 행복하게, 완벽하려고 하지 않는다.
곤도 마리에는 물건을 정리할 때 설렘을 느껴보라고 했는데 평소 물욕이 별로 없어 물건에 설렘을 느끼지 않는 나에겐 쓸 수 없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조금은 나다운 실용적인 기준이 있어서 적용해 볼만했다.
이 물건에 지금 관심 있어? 필요해? 이 걸로 뭐 하려고? 갖고 있으면 행복해?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나중에, 언젠가라는 식의 불확실한 미래로 넘겨버리게 된다면 없어도 되는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
내 책상 모니터 옆의 공간을 쭉 훑어보았다. 일단 컵이 두 개다. 라떼컵, 홍삼컵. 지난번 한 번에 옮길 짐이 많다며 다음으로 미루고 내려가서는 잊어버린 컵이다. '나중에'가 항상 문제인 듯하다.
모니터 뒤, 마우스패드 옆에는 흔히 잡동사니라고 불리는 물건이 서너 개가 보인다. 향수 테스트종이와 다 식어 빠진 핫팩, 약봉투, 다 먹은 쿠키통이 있다. 다락방에 쓰레기통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 것들은 버려야 할 것들이고 버리면 안 되는 것들도 상당량이다. 가로로 누워 두 개의 탑을 쌓고 있는 책이 열세 권이고 왼쪽으론 종류별 다른 노트 두 권과 세 권의 다이어리류까지. 글로 옮겨 적으니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글을 쓸 때가 아니라 얼른 일어나 정리를 해야 할 때인 것도 같다.
그래도 채우기까진 글을 쓰고 일어나자마자 버릴 것과 치울 것을 먼저 가지고 내려갔다 와야겠다. 다시 올라와 남길 물건들을 보기 좋게라도 정리해야겠다. 한 번 내려가면 귀찮다고 안 올라오기 일쑤다.
채우는 것은 필요한 것을 쓸 만큼만 쓸 때 사야 한다고 한다. 좀 더 싸게 사고 싶어 묶음으로 사거나 미리 사놓지 않아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란 걸 너무 잘 알기에 우선 자신을 알라고 하신다.
최우선으로 재고정리를 하라고 하셨다. 기록은 기본이다. 이걸 하려면 한 달이 걸릴 수도 있다는 말씀에 한숨이 나왔다. 정리 컨설턴트와 정리업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다락방을 보조 서재로 만들기 위해 창고처럼 쌓아두었던 물건을 큰맘 먹고 정리했다. 아들에게 공부할 공간을 더 주기 위함이고 남편이 발 벗고 나선 덕택이다. 결국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깔끔하고 멋진 공간까진 아니지만 책과 노트북을 두고도 남을 책상 하나를 둘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생겼다.
나만의 쓸 공간이 생겨서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브런치에 세 번의 글을 쓴 것만 봐도 그렇다.
정리를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고 잘하면 분명 좋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못하니 창피하고 속상하다.
정리에 대한 수업에 참여해서 글 한 편을 남길 수 있고 적어도 내 책상 위의 물건들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형인 이유는 결국 해야 한 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엄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