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점심으로 중식, 패밀리 레스토랑이 국룰 아닌가? 코다리찜이 최애음식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식당엔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우린 취향 껏 식당을 골랐다. 그렇다, 우린 모두 내향인으로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는 곳에 가면 기가 빨린다. 낯선 사람으로 가득 찼던 졸업식장에서 두어 시간 있던 걸로 충분했다.
졸업식 이후 두 남자만 시댁으로 가게 된 건 아들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외동의 외동인 아들은 유일한 손주다. 시부모님은 코로나로 초등학교 졸업식도 못 보셨기에 이번 졸업식은 직접 보고 싶어 하셨다. 별의별 것이 부끄러운 아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오시면 자기가 졸업식을 안 가겠다는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당일 축하해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헤아려 졸업식 직후 본인이 가기로 한 것이다.
외며느리인 나는 왜 안 따라나섰나? 다음 날 친구들과 만나기로 두 달 전에 선약을 했다. 2017년부터 매일 카톡방에서 만나는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들이다. 몇 달 만에 경남에 사는 친구까지 볼 수 있는 날이다. 며느리로서 19년 차니 그 정도 짬밥은 된다.
토요일 약속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대학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사라 학기 중에 바쁜 것이 뻔하기에 방학이 되면 이제 슬슬 보자는 연락이 온다. 자유부인이 된 걸 알자마자 1박 2일로 보자는 제안이 왔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한 번 보면 5~6시간 긴 이야기를 풀어야 하는데 다른 지역에 살기에 오가는 시간만 몇 시간이다 보니 당일치기론 어림없기 때문이다. 토요일 만남도 10시 넘어서야 끝났다. 이틀 내내 순수히 나로서 보냈다.
다시 딸, 엄마, 교사로 돌아왔다.
일요일엔 친정에 들러 얼마 전 허리를 다치신 엄마의 안부를 여쭙고 딸로서 하루를 보냈다.
월요일엔 다른 학교보다 일찍 예비소집을 하는 아들 고등학교에 데려다주었다. 3시간 동안 불편한 강당 의자에 앉아 강연 및 설명을 들었다며 투덜거린다. 맛있는 것을 사 먹이며 예비고 1로 동기부여를 하려고 했으나 아들의 말을 듣고 말기로 했다.
예비소집 후 소감이 "여러 가지로 무서웠어요."였다.
감정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뭐가 무서워?', '괜찮아'라고 할 수 없었다.
아들이 그렇게 느꼈으면 그런 거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고 호러물을 못 보며 익스트림 놀이기구를 못 타는 나로선 무섭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사흘은 정신 없이 보냈다.
목요일에 스튜디오 영상 촬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무슨 일이다냐?
약간의 호기심 + 배움에 대한 열망 + 받기만 하면 불편함 + 거절 못함 = 새로운 경험
내향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가끔 진취적이고 실행력 있어 보이는 이면의 공식이다.
이번에도 이 공식이 통했다.
마음공부를 꾸준히 하기 시작한 지 3년 차에 들어섰다. 리더로 열심히 해주시던 분이 작년에 출간을 하셨다.
그게 확장되어 연수 영상까지 촬영하게 되었는데 출연자가 몇 명 필요했다.
관객처럼 뒤통수만 보이고 호응만 하면 되는 줄 알고 흔쾌히 하겠다고 했으나 알고 보니 얼굴도 나오고 말도 제법 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네 명이 출연하는데 평소 강의를 하셨던 두 분 외 다른 두 명은 뭐라도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워낙 소수라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적어도 몇 년간 박제될 연수 영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일 아이들 앞에 서고 총회나 공개수업으로 가끔 학부모 앞에 서지만 영상에 남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다.
사전 협의 후 리딩도 하고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으며 내 말로 바꿔 전날 밤까지 외우기를 반복했다.
미용실도 미리 다녀오고 규정에 맞는 옷차림으로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는 빽빽한 양재동 빌딩 중 한 곳 10층에 있었다. 촬영 공간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환한 조명과 카메라 3대, 프롬프터(대사 반사경) 3대, 다양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앞에는 업무관련자, 촬영팀 3명이 계셨다.
무척이나 낯선 장소, 안 해본 일은 두려움을 몰고 오기 충분했다.
오전부터 강의를 찍고 계신 선생님이 대단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대기실에서 다시 맞춰보며 연습을 했다. 좌석 및 소품, 카메라 배치로 강의 순서와는 다르게 촬영을 했다.
내 순서가 되자 심장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외웠던 대사가 꼬였다. 눈치가 보였는데 촬영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나갔다. 내 눈동자, 표정, 발음, 목소리 다 모니터 해보고 싶었으나 난 그 정도 급이 아니었다.
내 만족감으로 NG를 낼 수는 없었다. 출연자 모두 괜찮은 거 맞냐며 물어보았으나 촬영팀이 괜찮고 'OK'라니 넘어갈 수밖에.
끝나고서야 마음 편히 빵과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소금빵 맛집이라더니 이제야 맛이 온전하게 느껴져 가는 길에 한 봉지씩 샀다.
아쉬우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촬영 전후의 소회를 나누었다.
차마 부끄러워 촬영된 내 영상은 볼 수가 없을 거 같다.
무명 시절을 회상하며 한 대사로 천 번은 연습했다던 유명 배우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이 경험은 내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영상 촬영이라는 무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를 깨웠다.
'안 해봐서 그렇지, 막상 해보면 할 만 해. 처음이니까 서툰 건 당연하지. 틀린다고 안 죽어.'
'영상 찍을 때 이런 걸 참고하면 되겠구나. 애들한테 말해줄 거 하나 더 늘었네.'
교사로 사는 게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모든 경험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금요일, 한 달 만에 병원에 갔다. 헛웃음이 나온다.
처음엔 갑상선 항진증이라 약을 두 알 처방받았다. 한 달 후 약이 정말 잘 들었는지 저하증으로 수치가 뚝 떨어졌다며 한 알로 줄였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저하증이란다.
그런데 항진증 약은 반알로 줄이고 저하증 약을 먹어야 한단다.
내 생각엔 항진증 약을 안 먹고 저하증 약을 약하게 먹으면 될 거 같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9월 중엔 말을 많이 해서 목 아픈 줄 알고 있다가 급성 갑상선염에 걸린 것도 몰랐고 학기 말엔 피곤한 게 정상인 줄 알고 있다가 항진증과 저하증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몰랐다.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다.
교사들도 피로를 달고 살다 보니 방학이 되어 여유 있다고 병원에 갔다가 병을 발견하거나 수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방학 중 아프면 아까운 방학을 날리는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하지만 학기 중에 이중고를 겪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어리석은 행동은 딱 우리 세대까지만 한다. 우리는 학급 아이들은 어쩌고 보결 부탁은 어떻게 하냐며 걱정했다. 아파도 꾸역꾸역 학교에 와서 수업하고 끝나고 조퇴했다. 흔히 MZ세대 교사는 아프면 병가를 낸다.
아프면 안 되는 엄마와 아빠, 그 역할을 학교에서 담임들이 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회에서 교사를 스승이 아닌 교육공무원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하는 게 맞다.
이런 변화가 아직은 당황스럽고 씁쓸할 때가 있다. 적어도 내게 아이들은 내 아들만큼 소중하기에.
교직을 사명이자 소명으로 알았던 분들, 아이들과 뭐라도 더 해보려고 했던 분들, 열정이 많았던 분들이 더 빨리 지쳐 학교를 떠나고 있다. 올해도 존경하는 선배님이 명퇴를 하셨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다. 무관심하면 마음과 몸이 아플 리 없다.
후배가 아이들과 아등바등하다 학부모님과 문제가 생겨 속상해하자 나이 지긋하신 선배님께서 한 말씀하신다.
"내 아이 아니다, 내가 꼭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해. 내려놔."
교사가 몸과 마음이 다쳐 그만두느니 상처를 주는 아이를 내려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렇게 상처진 자리엔 흉터를 남기고 딱지 떨어지 듯 열정이 떨어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