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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ight Queen Oct 30. 2022

<다섯번째> 학생을 지도할 때는 1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하고 복도에서 교실을 바라보던 교장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이유는? 수업시간에 영상을 보여주었다는 것. 그 시간은 영어회화시간이었다. 비원어민인 내가 자연스러운 영어를 학생들 앞에서 구사하는 것보다 좋은 영어 표현이 있다면 비디오 클립(숏폼) 형태로 만들어서 보여주곤 한다. 근데 2012년 추운 겨울, 대학원 학기를 마무리하러 서울을 왕래하는 와중에 틈틈이 일했던 일주일에 하루 방문 했던 그 학교. 부천의 I고 앞에 있던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그 학교 교장은 수업을 하던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잽싸게 튀어나가 일단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교장은 싸늘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뒷짐을 지고 가버렸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화가 나거나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놀란 아이들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왜요? 우리가 왜 수업시간에 영상을 보면 안돼요?


어떤 학생이 저쪽에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번호순으로 교장실 들어가서 why not? 이라고 원어민like한 제스처로 말해볼까요???

너털 웃음이 터졌다. 1주일에 하루밖에 안보는 나한테도 이렇게 살가운 학생들이라니.


교장선생님한테 서운할 새 없이 학생들이 귀엽기만 했던 26살의 나였다. 그 감정은 곧 시간이 지나 마음 속에서 억울함과 화로 바뀌었다. 같은 실을 쓰던 영어 선생님에게 넌지시 말씀을 드렸다.

키가 작고 소박한 행색의 그녀는 정교사였고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음. 선생님이 정교사여도 그랬을까요?


그랬다. 공립학교 정교사들은 서로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한다. 후에 알게 되었던 사실이어서 상당히 억울한 감이 있었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영화를 보여주든, 동영상을 보여주든 이렇게 까지 소리를 지를 일이 없었다.


한 쪽으로 마음이 안좋으면서도 그 때 까지 별 생각이 없었다. 왜? 나는 교사가 꿈이 아니었으니까. 학창시절 답답하고 비합리적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 이 학교에서 평생을? NO. 절대. 절대 나는 이걸 평생하지 않을거니까. 무슨 상관?


이듬해 나는 처음으로 1년짜리 기간제를 하게 되었다. 설레었다. 이 넓은 수도권에서, 그것도 1년짜리. 20대에 느끼는 1년은 왜 그렇게 길고 지난한 시간인지. 설레는 마음으로 업무분장을 받았다. 일할 곳은..그것도 나중에 거기를 어떻게 1년이나 참았나 싶을 정도로 포악하고 비인격적인 곳으로 전국적으로 소문난 J고등학교였다.


그곳을 나오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곳은 전국적으로 기간제 선생님의 무덤으로 불렸다는 것을. 내 자리는 진짜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해서 생긴 공석이었음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20대 떄는 그게 영 찜찜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난 그걸 알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학생부를 맡았다. 7시 15분 전에 학교의 정문 앞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열정에 불타 올랐다. 학생들과의 관계는 생각치도 않고 학생들의 머리길이를 눈대중으로만 보고 벌점을 남발했다. 결과는? 나를 아주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걸 전혀 몰랐다. 남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나는 철저히 업무와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마트 계산대에 하나씩 하나씩 간격을 두고 들어오는 물건 처럼, 학생들은 그렇게 스캐닝 당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학생부 선생님들과 함께 스탠딩 책상에 목석처럼 서서. 무엇이라도 된 것 마냥 그들의 눈빛과 제스쳐를 따라했다.


돌이켜보면 미련하기 짝이없는 행실이었다. 그저 시키는대로, 이 일을 지시한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다니. 아침부터 등교하던 학생들은 정문에서 매섭게 바라보는 내가 얼마나 싫었을까.


나는 그저 단지 누군가이고 싶었다. 내가 학생부에서 이렇게 일하자 마자. 나는 도시빈민 대학원 휴학생이서 갑자기 저들에게 영향력있는 존재가 된것 같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속내가 있었다.

지금은 분명히 판단 할 수 있다. 뭐에 씌인것 같은 아주아주 잘 못된 행동이었다고.


이사장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다. 교무실까지 들어와 선생님들의 자리를 체크하고 전화기줄이 꼬이면 조직이 안돌아간다며 일과 중에 갑자기 들어와서 내 자리 전화기까지 만지고 갔다. 그리고 아주 더운 여름방학 아침, 저 학생의 머리 길이를 나한테 지적질하라고 소리쳤다. 너는 지적질하지 않거나 벌점을 주지 않으면 네 할일을 한게 아니라고 말했던 것 같다. 놀란 그 학생이 튀었다. 나를 밀치며 저기로 뛰어가 저녀석을 잡아오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넓은 복도를 뛰었다.


또 한번은 교원능력개발평가 전날이었던 것 같다. 어떤 선생님이 아이들을 시켜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오더니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래야 교원능력개발평가 점수가 잘나온다고 했다.

마음속에서 정말 비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렇게 까지 해서 5점을 맞아야해? 교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비열한 선택을 해?


그렇다. 맞아야한다. 특히 재단에서 정교사가 되려면. 학생들에게 좋은 평을 받아야한다.

무조건. 필수조건이다.


교사들은(특히 여교사들은) 정해진 슬리퍼 국룰 같은게 있다. 두껍고, 무거운,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검은색 슬리퍼를 신어야 한다. 지하상가에서 2만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그걸 신고 다녔다.


어느날 뒤에서 오던 영어과 여자 정교사 선생님이 그렇게 얘기했다. 발에 소리 좀 내고 걷지마!

아, 네~ 하며 발에 힘을 줄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슨 학교에서 일하든 발에 힘을 주고 걷지 않는다.

나는 그냥 계약기간이 끝나면 이 곳을 떠날거니까. 언제든 없어져도 되는 사람이니까. 소리내지 말라는 여자의 말처럼. 조용히 살기로 했다.

그 분은 모의고사가 끝나면 나에게 큰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푼 OMR카드를 가지러 본교무실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저 옆 건물. 별관 3층으로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것도 명백히 자신의 일을 나한테 미룬 행위였다. 나는 그걸 그 당시에는 내가 당연히 해야할 선생님의 지시를 받는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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