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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ight Queen Oct 27. 2022

<네 번째> 담임교사로서의 태도

아이를 낳고 3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기 전에 근무 했던 지역사회의 악명높기로 유명한 사립재단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담임교사로서의 태도. 첫 담임을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맡았다.


교육철학이라고는 대학교 때 배운게 전부인 나. 5년간의 외로운 도시 생활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을 잃어버린 나 답게 학생들에게 다가가는게 서툴렀다. 당시 부장 선생님이자 우리반 부담임 선생님이었던 그 분은 나를 항상 불안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5년간 편해 본적이라고는 없는 잠자리와 식사. 딴에 준비해보겠다고 1년 정도 임용고시 공부를 집중하며 더욱 홀로지내는 삶 속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지냈던 29살의 내가 15살 학생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었겠는가. 마음속 깊은 상처를 받고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 사람임에 다름 없었다.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상대방의 유머를 어떻게 응수해야할지. 사람에게 말 거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고독사를 주제로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특히 노인 고독사가 아니라 20-30대 여성 고독사를 접하며 그 때의 나를 떠올린적 있다. 내가 이 방에서 홀로 죽어도 아무도 나를 한 동안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깊게 우울했다.


집을 옮겨 옮겨 경기도 부천의 작은 오피스텔로 옮겼다.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나는 그 오피스텔 문을 닫고 나올 때 마다 영화 타짜에서 고독한 방안에서 홀로 태워지던 담배연기를 연상했다. 그 공간은 분명 햇살이 많이 들어왔고, 깨끗했다. 근데 이상했다. 오랜시간 거기 있으면 웬지 잘못된 선택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에 한 번 입밖으로 말 한번 꺼내지 않고 임용고시 공부에 몰두 했다.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이상하게 하고 있는데 하는게 안하는것 보다 못한 것 같은 결과를 낸다는 생각이 드는 아주 기괴한 시험이었다. 이때 한번하고 안되었으니 그만 두었어야 했다.


떠밀려 떠밀려 결국 고향의 그 학교로 왔다. 모든게 시차를 두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회복적 생활 교육. 크리스천 재단인 학교답게 인간 향기나는 휴머니스트 선배교사들로부터 삶을 배웠다. 8시 5분전 이른 아침의 싱그러움과 여중생들이 복도를 쿵쾅거리면서 뛰어오는 소리. 반가운 아침 인사들. 산 자락 근처의 학교 답게 봄에는 벚꽃을, 가을에는 빨갛고 주황빛 향연을 병풍삼아 창문 밖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가진 교무실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였기 때문에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과 마음들이 지금도 두둥실 떠오르고, 삶의 태도가 되었다. 아 이래서 젊은날의 경험이 중요하구나.


휴머니스트 선배선생님들과 이 공간에서 오래 함께 그들과 호흡맞춰온 기간제 선생님들. 이 학교는 모든일에 최선을 다한다. 학생 생활지도, 학업 성취, 학교의 모든 자질구레한 행사 등. 100가지 일에 100명의 힘을 짜내고 짜내서 보탠다. 모든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한다.

내가 맡은 부서는 창의인성부였고, 부장 선생님을 돕는 기획 선생님 자리였다. 2015년, 첫 담임. 업무강도는 대단했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중학영어를 주 당 37-38시간씩 가르쳤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첨언하면, 일주일에 보통 영어교사는 14 - 16시간 수업을 한다. 담임을 하다보니 정말 별의별 일이 많았다. 7시 30분도 안되었는데 전화하는 학부모, 학교 밖으로 대체 어떻게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 그들을 관리 하지 못한다 교감선생님께 받는 질타들. 수 많은 스트레스 끝에 탈모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박 2일 캠프는 거의 매주 진행 되었다. 밤늦게까지, 내가 근무 했던 학교는 주말마다 아이들이 요리하는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저녁엔 함께 얼굴에 팩을 붙이고 또 내가 붙여주기도 했다. 게임을 하며 얼굴에 스티커를 붙였다. 아이들의 푸르렀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것 같다. 그 학교의 강당을 걸으면 삐그덕삐그덕 바닥에서 나무끼리 부딫히던 소리가 난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10시까지 행사를 하고 다음날 아침 7시에 급식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가면 어느새 주말이 지나 있었다. 잠시라도 숨쉴 틈이 없었다.


1년을 빈틈없이 보냈다. 행사 기획을 위한 품의회계 서류 기안, 기안하는 법, 행사 진행, 행사 사진찍기, 창피하고 학생들에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수업시간을 그냥 준비없이 들어가서 즉흥적으로 시간을 보낸적도 있다. 중학교라 가능했다.


어릴 때 부터 피아노대회에 나가서 많은 대중들 앞에 서는게 익숙하다. 깜깜한 청중속에서 내가 치는 그랜드 피아노 소나타곡이 울려퍼졌을 때를 기억한다. 곡을 치기 전 건반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비췄다. 주황색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나는 무엇인가 나를 이끄는 힘대로 아무런 긴장 없이. 혹은 꼭 잘 쳐내야 한다는 부담 없이 곡을 쳐냈다. 부분대상을 받았다. 대상 바로 아래의 상이라고 했다. 관객석에서 나를 치켜보던 엄마는 항상 콩쿨에 참여하면 너는 항상 떨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신기하다고. 근데 나는 타고난 ENTJ인지라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흔히 말하는 무대체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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