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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Feb 22. 2021

3월을 위한 영화 31편 03

3월 7일 - 9일: The Place

에든버러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펍(Pub)'의 기능이었다. 영국인들의 삶에서 펍이 아주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저 친구들과의 교제의 장소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에든버러의 어느 동네 펍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이들 생일파티를 해주는 것을 보고는 펍이라는 게 단순히 맥주 마시며 떠드는 공간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공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사람들은 공간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만나고 감정을 나눈다. 여기 등장하는 세 공간 또한 그런 곳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이해하고, 보듬는 장소다. 그래서 봄이 되면 꼭 이곳들을 기억하고 떠올리고 그리고 싶어 진다.


[3월 7일] 초콜릿 Chocolat, 2000


감독 라세 할스트롬 Lasse Hallström

각본 로버트 넬슨 제이콥스 Robert Nelson Jacobs

출연 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 알프레드 몰리나 Alfred Molina, 주디 덴치 Judi Dench, 캐리 앤 모스 Carrie-Anne Moss, 레나 올린 Lena Olin, 조니 뎁 Johnny Depp

1959년,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 그들만의 규칙과 상식에 갇혀 살아가던 마을에 어느 날 북풍과 함께 두 모녀가 찾아온다. 비안은 딸 아눅을 데리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가게를 얻고, 개업을 준비한다. 매우 보수적인 이 마을의 시장은, 전통과 관습에 매여 있는 레이노 백작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근면, 겸손, 절제이며, 자신이 따르는 가치들을 모든 마을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한다. 그는 거의 모든 일, 심지어 신부의 설교까지 일일이 관리한다. 마을에 새 사람이 찾아오자 그는 개업 준비를 하고 있는 비안에게 찾아가 주일 예배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지만 그녀는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게다가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그리고 절제와 회개로 보내야 할 사순절 기간에 과자 가게를 연다는 사실에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얼마 후, 비안은 '마야'라는 초콜릿 가게를 연다. 마을 사람들은 초콜릿이 먹음직스럽게 장식된 가게 앞을 지나며 호기심을 내비치지만 다들 사순절을 지키느라 선뜻 가게에 발을 들이지는 못한다. 비안은 가게에 온 한 여자 손님에게 남편의 정열을 되찾아 줄 것이라며 과테말라 산 초콜릿을 한 봉지 선물한다. 비안의 말처럼 그녀의 남편은 비안이 추천해준 초콜릿을 먹고 정열을 되찾는다. 비안의 가게에는 서서히 하나둘씩 손님들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아르망드는 비안이 세를 얻은 가게 건물의 주인인데, 백발이 성성한 그녀에게는 카롤린이라는 딸과 루크라는 손자가 있지만, 그녀의 딸은 그녀가 손자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여자로 취급받는 조세핀에게는 도벽이 있는데, 이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스트레스성 장애 같은 것이다. 강아지 찰리와 함께 사는 블레로 영감은 오델 부인을 좋아하지만, 1차 대전 때 죽은 남편을 기리고 있는 그녀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비안은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취향을 알아보고 그에 어울리는 초콜릿을 추천해 주고, 마을의 분위기에 눌려 있던 사람들은 비안의 가게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안의 가게에 드나드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레이노 백작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비안의 가게에 가지 말라며 그녀를 경계한다.


레이노 백작은 매우 경직되어 있다. 자신을 떠난 아내가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지키는 덕목을 다른 모든 사람이 똑같이 지키기를 바라며, 자신이 쳐놓은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려 무던히 괴로워하며 노력한다. 뭐랄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사들 같달까? 자기들이 정해놓은 금서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어리석음을 가진 그 사람들 말이다. 그런 시장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눌려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런 곳에 비안이 찾아온다. 북풍이 불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가 만드는 초콜릿. 그녀의 가게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녀가 내미는 초콜릿을 먹으면 마음을 연다. 조금씩이든 활짝이든 상관없다. 상대가 어떤 초콜릿을 가장 좋아할지 파악하고 그것을 추천해 줄 때, 아무에게도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안의 초콜릿 가게는 마을 사람들의 본능을 깨우는 곳이다. 비안의 초콜릿 가게가 생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갇혀있는지, 경직되어 있는지, 스스로의 행복에서 물러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안의 초콜릿을 통해 그 삶에 틈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삶에도 그런 틈을 허용한다. 그리고 후에 비안이 마음을 닫게 되었을 땐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그녀를 붙잡는다. 그리고 레이노 백작은 절제와 엄격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마을은 경직되었던 분위기에서 깨어나 축제를 즐기게 된다. 


[3월 8일] 카모메 식당 かもめ食堂, 2006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각본 오기가미 나오코

출연 코바야시 사토미, 카타기리 하이리, 모타이 마사코

핀란드 헬싱키의 카모메 식당. 사치에가 운영하고 있는 '갈매기'라는 뜻을 지닌 식당은 소소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문을 연 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이렇다 할 손님을 찾아볼 수 없다. 동네에 사는 세 명의 아주머니는 오늘도 식당 앞을 지나다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주인인 사치에를 향한 호기심을 드러내지만, 그저 그렇게 지나갈 뿐이다. 어느 날, 일본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핀란드인 청년이 식당에 들어온다. 카모메 식당이 맞는 첫 손님이다. 청년은 사치에에게 애니메이션 갓챠맨 주제곡 가사를 아는지 물어보고, 사치에는 첫 구절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해한다. 서점에 간 사치에는 서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일본인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갓챠맨 주제곡 가사를 아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갓챠맨의 가사를 모두 적어주고, 어디든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펴놓고 눈을 감고 찍은 곳에 와버린 미도리와 사치에는 그렇게 만나게 된다. 사치에는 미도리에게 자신의 집에 함께 머물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함께 지내며 식당일도 같이 하게 된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와 커피를 시키고,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다. 사치에는 정말 커피가 더 맛있어졌음을 알고 좋아한다. 미도리는 식당에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치에에게 현지 재료를 이용한 새로운 오니기리를 제안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다음날 사치에는 미도리와 함께 시나몬롤을 만든다. 매번 지나갈 때마다 식당 앞에서 호기심만 드러내던 동네 아주머니 세 명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시나몬롤 냄새에 반해 처음으로 식당에 발을 들인다. 이후 식당에는 손님들이 들기 시작한다.


주인공 사치에는 혼자 헬싱키에서 일식당을 운영한다. 메인 메뉴는 오니기리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에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아버지가 해주었던 음식이 오니기리였다. 그녀는 카모메 식당이 동네 사람들이 가볍게 찾아와 먹고 갈 수 있는 그런 곳이길 바랐다. 7개의 테이블이 놓인 자그마한 식당은 어쩌면 일본스럽고, 어쩌면 북유럽스럽다. 간결하고 깔끔해서 군더더기 없는 느낌. 텅 빈 테이블만 가득하던 공간에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지도 위의 한 군데를 찍어 무작정 떠나온 미도리, 20년간 부모님 병시중을 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티브이에서 에어기타 대회를 보고 핀란드에 온 마사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토미, 갑자기 자신을 떠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리사, 개인적인 일로 장사를 접어야만 했던 마티. 식당은 '먹는다'는 인류 보편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사치에는 그 공간을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곳으로 만든다. 식당과 메뉴에 담긴 그녀의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이 공간에도 그대로 스며있는 듯하다.


[3월 9일]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1987


감독 퍼시 아들론 Percy Adlon

각본 엘레노어 아들론 Eleonore Adlon, 퍼시 아들론 Percy Adlon, 크리스토퍼 도허티 Christopher Doherty

출연 마리안 재거브래쉬트 Marianne Sägebrecht, CCH 파운더 CCH Pounder, 잭 팔런스 Jack Palance

캘리포니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한가운데, 남편과 여행 중이던 독일인 야스민은 그와의 다툼 끝에 짐을 들고 혼자만의 길을 나선다. 인근 고속도로 중간에 자리 잡은 바그다드 주유소 카페&모텔. 술은 허가를 받지 못해 못 팔고, 커피는 커피머신이 고장 나서 팔 수 없다. 손님이라고는 모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루디와 데비, 가끔씩 들리는 트럭 운전사들이 전부다. 주인인 브렌다는 잔뜩 화가 나있다. 10대 딸은 공부는커녕 남자들과 놀러 다니기 바쁘고, 아들은 자기 아이는 돌보지 않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피아노만 뚱땅거린다. 남편은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정장 투피스에 구두를 신고, 모자를 눌러쓰고,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며 야스민이 도달한 곳은 바로 바그다드 주유소 카페 & 모텔이다. 주인인 브렌다는 몇 시간 전, 남편을 쫓아 보냈다. 그렇게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을 때 멀리서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는 야스민을 발견한다. 그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사무실 책상에 앉아 야스민의 체크인을 도와주고, 그녀에게 1번 방 열쇠를 준다. 브렌다는 야스민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방에 남자 물건과 남자 옷이 가득한 거며, 자신이 외출했을 때 사무실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거 하며,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과도 서슴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까지... 그러나 곧 야스민은 브렌다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


바그다드 카페는 겉으로 보기에만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또한 황량하고 적막하다. 카페와 모텔, 두 자녀와 손자, 그리고 남편까지. 브렌다는 이 모든 짐에 눌려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잔뜩 화가 나있고, 어느 것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남편을 쫓아 보낸 그녀와 남편을 두고 온 야스민이 만나는 순간, 브렌다는 눈물을 닦고, 야스민은 땀을 닦는다. 브렌다에게는 바닥난 에너지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했고, 야스민은 넘치는 에너지를 쓸 대상이 필요했다. 야스민은 브렌다의 딸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고, 아들에게는 그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어 준다. 그리고 왕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 세트를 그렸던 루디 콕스에게는 그의 그림의 모델이 되어 준다. 그리고 브렌다에게는 에너지가 되어 준다. 야스민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매력적이다. 외모적으로 크게 호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밝은 성격인 것도 아니고,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용히 다가가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바그다드 카페는 사람들이 모이고, 브렌다가 웃고, 야스민이 즐거워하는 곳이 된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던 Calling You에 이젠 미소 지으며 반응할 수 있는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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