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 Remains of the Day'과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로 알려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신작이 3월 초 출간되었다. 한국어 번역본은 민음사에서 3월 26일 출간 예정. 2월 말, 우연히 Waterstones 앱을 뒤적이다가 이시구로의 신간을 발견했다. 예약 판매 중이었지만, 페이버&페이버(Faber &Faber)에서 나온 커버가 참 예뻐서 바로 주문하고 싶었는데, 배송료가 책 값이랑 별 차이가 없고, 배송료 아끼려 다른 책도 같이 주문하려니 배송료가 계속 올라가고. 결국 타협점을 찾은 것은 국내 도서 업체를 통해 구매한 미국판 양장본. 영국판에 비하면 표지가 굉장히 매력 없지만, 내용은 동일하니까.
클라라는 AI이다. 10대들이 외롭지 않도록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그녀의 주된 임무이다. 그래서 클라라와 같은 모델은 AF(Artificial Friend)로 불린다. 클라라는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가게에 진열되어 있으면서 바깥세상을 관찰한다. 현재의 자신이 아직 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관찰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조시'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와 함께 살게 된다. 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조시, 조시의 엄마, 가정부 멜라니아, 조시의 친구 릭 등을 만나며 더 다양한 감정들을 알아가고, 무엇보다 조시를 위한 계획을 이뤄나간다.
AI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와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부분도 중간중간 드러나지만, 이 작품은 'AI' 보다는 '사랑'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다른 AI를 소재로 한 이야기와 다른 것은, 감정을 학습한 AI가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 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좀 우습게 말하자면 무슨 AI가 이토록 토테미즘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클라라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책을 읽고 나니, 관련된 영화들도 보고 싶어 져서 AI가 등장하는 영화를 찾아보았다.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 Drake Doremus
각본 리처드 그린버그 Richard Greenberg
출연 이완 맥그리거 Ewan McGregor, 레아 세이두 Léa Seydoux, 테오 제임스 Theo James
인간에게 최고의 동반자가 되어줄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는 과학자 콜은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인간관계를 위한 여러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가 개발해 낸 것 중 하나는, 두 연인의 관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를 분석하고 예측해주는 프로그램. 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조는 연구소를 방문한 연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테스트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콜에게 마음이 있었던 조는, 자신과 콜의 연애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테스트한다. 결과는 절망적 이게도 0%가 나오고, 얼마 후 그녀는 콜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콜은 그녀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인공지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현실일까, 아니면 동화 같은 상상력일까? 과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혹 후자라면 결말까지 기분 좋은 상상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전자라면 결말에서 살짝 삐끗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냥 조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그녀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괜찮은 로맨스를 만날 수도.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관계를 위해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콜인데, 정말 인간과 같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줄 인공지능이 만들어진다면 진짜 인간과 인간의 관계나 교류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연구를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감독 알렉스 갈란드 Alex Garland
각본 알렉스 갈란드 Alex Garland
출연 알리시아 비칸데르 Alicia Vikander, 도널 글리슨 Domhnall Gleeson, 오스카 아이작 Oscar Isaac
'블루북'이라는 회사의 프로그래머인 케일럽은 회사 직원들 중 한 명으로 뽑혀 CEO인 네이든의 저택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된다. 산과 강에 둘러싸여 고립된 네이든의 저택에 도착한 케일럽은 네이든에게서 자신이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에게서 튜링 테스트를 제안받는다. 튜링 테스트는 인간과 기계가 함께하는 테스트로, 상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문자화 된 대화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다만, 케일럽이 참여하는 튜링 테스트는 인공지능인 상대를 보면서 말로 대화하는 것이다. 케이럽은 그렇게 인공지능 에이바를 대면하게 된다.
누가 누구를 속이는 것인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인공지능과 그를 만든 인간, 그리고 외부인이 함께 만들어 내는 스릴러 영화이다. '어바웃 타임'의 팀 역할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런지 똑똑한 프로그래머 역할이 처음에는 확 와 닿지 않지만, 보고 나면 '그래, 너라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각본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출연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Haley Joel Osment, 주드 로 Jude Law, 윌리엄 허트 William Hurt, 프랜시스 오코너 Frances O'Connor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로 인하여 큰 도시들이 물에 잠긴 어느 미래.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제약되어 있고, 세계는 산아제한으로 인간의 개체 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메카'로 불리는 기계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하비 교수는 진화된 형태의 메카를 만들고자 하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어린아이 메카를 구상한다. 그리고 아이의 질병으로 슬픔을 겪고 있던 모니카 부부에게 '데이비드'라는 어린아이 메카를 시험 삼아 선물한다. 모니카는 인간과 같은 외형을 가진 메카를 아들로 대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곧 그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데이비드는 모니카를 엄마라 부르며 그녀의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떠나 있던 모니카의 진짜 아들 마틴이 돌아오고, 그녀는 결국 데이비드를 버리게 된다.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에 관한 가장 유명한 영화가 아닐까 한다. 엄마의 사랑을 갈망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갈망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를 만든 것이 인간이니까.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 Alex Proyas
각본 제프 빈터 Jeff Vintar, 아키바 골즈먼 Akiva Goldsman
출연 윌 스미스 Will Smith, 브리짓 모나한 Bridget Moynahan, 제임스 크롬웰 James Cromwell, 브루스 그린우드 Bruce Greenwood
2035년, 로봇 3원칙에 의해 로봇이 만들어진 이후, 그들은 인간을 보호하고 돕는 역할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경찰 스푸너는 과거의 일로 인하여 로봇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한편 로봇 생산업체인 USR은 NS-4 모델의 NS-5 모델로의 업그레이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때 USR의 설립자이자 로봇 공학자인 래닝 박사의 죽음이 경찰에 접수된다. 모두들 래닝 박사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이지만, 스푸너는 그의 죽음에 무언가 음모가 있다고 믿고, 그가 죽기 전 머물렀던 연구실을 조사하던 중 한 로봇을 만나게 된다.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살인(?) 사건과 인공지능, 그리고 기계의 진화. 무엇보다 로봇 써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감독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각본 햄튼 팬처 Hampton Fancher, 데이비드 웹 피플즈 David Webb Peoples
출연 해리슨 포드 Harrison Ford, 룻거 하우어 Rutger Hauer, 손 영 Sean Young
2019년의 L.A. 황폐화된 지구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 회색 도시를 채우고 있다. 타이렐社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고 전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레플리컨트로 불리는 복제인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의 출입이 금지된다. 이후 레플리컨트들은 몰래 지구에 숨어들고, 겉모습으로는 인간과의 구분이 어려운 그들을 찾아내 퇴역시키는 임무를 맡은 경찰들을 '블레이드 러너'라 부른다. 전직 블레이드 러너였던 데커드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타이렐사에 침입했던 4명의 넥서스 6 레플리컨트를 찾아내 퇴역시키라는 것.
블레이드 러너는 전설이 된 작품이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속에 생명을 갈구하는 복제인간을 그려 넣은 영화이다. 종일 비가 내리는 회색빛 도시와 방겔리스의 침울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전자음악은 영화의 소재와 주제를 대변한다. 엄밀히 말하면 AI는 아니지만, AI와 함께 다루어도 무방한 이야기라 골라보았다.
감독 드니 빌뇌브 Denis Villeneuve
각본 햄튼 팬처 Hampton Fancher, 마이클 그린 Michael Green
출연 라이언 고슬링 Ryan Gosling, 로빈 라이트 Robin Wright, 안나 드 아르마스 Ana de Armas, 실비아 혹스 Sylvia Hoeks, 해리슨 포드 Harrison Ford, 제러드 레토 Jared Leto
2019년으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레플리컨트 경찰 K는 블레이드 러너로, 지구에 숨어 있는 레플리컨트들을 찾아내 퇴역시킨다. 지구에 오래 숨어 살았던 한 레플리컨트를 퇴역시킨 K는 그가 살고 있던 곳의 나무 아래에서 이상한 상자를 발견한다. 레플리컨트 군인에게 군 보급품함으로 지급되었던 상자 안에는 여자의 뼈가 들어 있다. 여성은 뼈의 상태로 보아 출산 중 죽은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신기한 것은 그 여성이 인간이 아닌 레플리컨트라는 것이다. K는 국장의 명령을 따라 레플리컨트 여성이 낳은 아이를 찾아 나선다.
흥미로운 소재다. 아이를 낳는 레플리컨트. 기계가 아닌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복제인간이니 영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보자. '블레이드 러너'의 배티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오리온 전투에 참가하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를 바라봤던 배티, 그가 원한 것은 지금 보다 더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전쟁 용병으로 만들어진 그가 사람들을 공격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만, 또한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삶에 대한 애착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 레플리컨트라... 아이를 낳는다는 건 우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주인이라는 증거라며 반란을 꾀하는 레플리컨트. 여기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동요는 연민이나 공감이 아닌 두려움뿐.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와는 다른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