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ppy Eponine Aug 05. 2021

여름을 위한 영화 31편 03

7일 - 9일: 여름 여행

여름엔 한 해 중 가장 오랫동안 쉴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진다. 그래서인지 '여름'이라는 계절 뒤에는 '휴가' 또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듯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보통 7월 말, 8월 초가 되면 각 지역의 휴가지와 공항이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로 붐비곤 한다. 물론 올해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코로나19는 2020년을 넘어 올해 여름에도 사람들의 발을 묶어 두고 있다. 휴양지 바닷가에서 만끽하는 여유로움도, 배낭여행의 낭만도 다시금 미뤄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엔 여행에 관련한 영화들을 골라보았다. 대표적인 유럽의 관광지인 프랑스의 파리,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 이탈리아의 베니스, 그리고 영국의 런던. 현실은 방구석이지만, 영화를 보는 잠시만이라도 그곳에 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여정 Summertime, 1955


감독 데이비드 린 David Lean

각본 H.E. 베이츠 H.E. Bates, 데이비드 린 David Lean

출연 캐서린 헵번 Katharine Hepburn, 로사노 브라찌 Rossano Brazzi

미혼의 중년 미국인 여성 제인은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을 시작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바로 이탈리아의 베니스. 그녀는 기차역에서 내려 수상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이탈리아인 미망인이 운영하고 있는 숙소 '펜시오네 피오리니'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든다. 그녀의 방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베니스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그녀는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들은 각자의 일정으로 바쁘기만 하다. 베니스에 오면서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을 품었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여전히 혼자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어느 오후, 제인은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야외 카페에 앉아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때 그녀는 홀로 테이블에 앉아 베니스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때 그녀의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에 당황한 그녀는 짐을 챙겨 급하게 자리를 뜬다. 다음 날, 베니스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한 앤틱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던 빨간색 고블릿 잔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제 산 마르코 광장의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 레나토를 다시 만난다. 가게의 주인인 그는 제인에게 고블릿 잔이 18세기 앤틱 제품이라며 그녀에게 그것을 팔고, 고블릿 잔을 쌍으로 사기 원했던 그녀는 제품을 하나 더 구하면 연락하겠다는 그의 말에 숙소 주소를 남기고 돌아선다. 다음날, 다시 레나토의 가게를 찾은 제인은 그가 없자 실망하며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가게 전면을 카메라에 담다가 실수로 강물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그녀는 다시 숙소로 돌아가고, 그날 저녁 숙소로 자신을 찾아온 레나토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는 1952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던 아서 로렌츠의 희곡인 'The Time of the Cuckoo'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중년의 여성이 꿈꾸던 여행지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다시 떠나오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사람인지는 그녀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젊은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는 젊은 남자들을 보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위험인물이 아닌가 하여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에서 그녀가 남자와의 만남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고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언제 떠날지 몰라 늘 파티에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나 기회를 놓치기 쉬운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려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지인 베니스에서 그 로맨틱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다시 그녀는 떠나야 할 때를 생각하게 된다. 어느 지점에서는 미소가 지어졌다가도 또 다른 지점에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렵게 만들지만, 아름다운 베니스를 가득 담은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린도 영화 촬영 이후 베니스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고 하니 영화에도 그러한 애정이 담겨있을 수밖에. 50년대에 찍은 영화이지만, 그때의 베니스와 현재의 베니스는 크게 변한 것이 없을 것이다. 거의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베니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제인이 레나토를 만났던 산 마르코 광장도, 둘의 사랑이 머물렀던 무라노 섬도, 행복한 추억일지 후회가 앞서는 추억일지 모를 그녀의 기억들과 함께.


몬테 카를로 Monte Carlo, 2011


감독 토마스 베주카 Thomas Bezucha

각본 토마스 베주카 Thomas Bezucha, 에이프릴 블레어 April Blair, 마리아 마젠티 Maria Maggenti

출연 셀레나 고메스 Selena Gomez, 케이티 캐시디 Katie Cassidy, 레이튼 미스터 Leighton Meester, 코리 몬티스 Cory Monteith, 루크 브레이시 Luke Bracey, 피에르 불랑제 Pierre Boulanger

그레이스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 엠마와 파리에 갈 돈을 모으고 있다. 드디어 졸업을 하고 파리로 떠나기 하루 전, 갑작스럽게도 별로 친하지 않은 의붓언니 메그가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세 사람은 파리로 향한다. 그러나 센강을 거닐고, 에펠탑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간 파리에서 세 사람은 단체 관광의 늪에 빠지고 만다. 유명 관광지는 그저 버스 안에서 눈으로만 구경할 뿐이고 그나마 발을 디딘 곳에서는 줄을 따라 이동하며 발자국만 남길뿐 서둘러 떠나기 바쁘다. 호텔 또한 기대와 달리 허름한 동네 모텔급이다. 사크레쾨르 성당과 에펠탑에서 바라보는 파리는 너무 아름답기만 한데 그들에게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가 없다. 결국 에펠탑에서 넋 놓고 파리 시내를 바라보던 세 명은 단체 관광버스를 놓치게 되고, 파리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상상과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게 되자 여행을 준비한 그레이스는 엠마와 메그에게 미안해지고, 이 여행을 상상한 만큼 즐기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세 사람은 버스를 놓친 후 걸어서 호텔까지 가지만,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비를 피하기 위해 인근 고급 호텔에 들어가 화장실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레이스와 너무도 똑같이 생긴 영국인 상속녀인 코델리아를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 내 모든 사랑과 슬픔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담겨있는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일이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책에 별첨으로 주어진 새 페이지를 채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행은 사실 상상보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게 끝이 난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떠나지만, 대부분은 그냥 여행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특별한 일을 상상하고 기대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마음에 더 부채질을 해댄다.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그것이 이러한 영화의 미덕일 것이다. 평범한 미국인 소녀가 자신과 똑 닮은 영국인 상속녀로 오해받으면서 고급 호텔의 스위트 룸에 머물게 되고,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까지 가게 된다. 몬테 카를로의 세 사람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랑을 찾아가고, 최고로 특별한 여행을 경험한다. 모나코가 배경이라고 굳이 여주인공의 이름을 '그레이스'라고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아름다운 휴양 도시를 배경으로 아슬아슬하지만 작은 사랑을 이루어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신난다. 


왓 어 걸 원츠 What a girl wants, 2003


감독 데니 고든 Dennie Gordon

각본 제니 빅스 Jenny Bicks, 엘리자베스 챈들러 Elizabeth Chandler

출연 아만다 바인즈 Amanda Bynes, 콜린 퍼스 Colin Firth, 켈리 프레스턴 Kelly Preston, 아일린 앳킨스 Eileen Atkins, 안나 챈슬러 Anna Chancellor, 조나단 프라이스 Jonathan Pryce, 올리버 제임스 Oliver James

뉴욕에서 태어나 차이나타운의 아파트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대프니는 매해 생일마다 소원을 빌곤 했다. 엄마에게 전해 듣기만 했던 아빠 '헨리'가 나타나길 말이다. 대프니의 엄마 리비는 모로코 사막에서 영국인 헨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둘은 베두인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후 런던으로 갔다. 영국 귀족이었던 헨리의 가족들은 리비를 환영하지 않았고, 헨리의 아버지마저 갑자기 돌아가시자 헨리는 대쉬우드 경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다해야 했다. 리비는 그 복잡한 상황 가운데 헨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뉴욕으로 돌아와 홀로 대프니를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프니의 17살 생일, 그녀는 웨딩싱어인 엄마를 따라 웨이트리스로 결혼식에 가고, 그곳에서 신부와 신부의 아버지가 함께 춤추는 것을 보며 우울해한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장면이 대프니를 슬프게 한 것이다. 누군지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사람, 대프니의 아빠, 헨리 대쉬우드 경. 대프니는 짐을 싸고,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들고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이 그리울 때마다 보는 영화가 몇 편 있다. '해피 고 럭키', '런, 팻 보이, 런', 그리고 이 영화이다. 세 영화 모두 런던이라는 곳이 주는 분위기를 잘 느끼게끔 해준다. 세 이야기 모두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어서 왜 하필 저 세 편의 영화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애매하고 어렵지만, 유독 세 편의 영화가 내게는 런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거나 또는 그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곤 한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웨딩싱어인 엄마와 함께 자유롭게 자라난 미국인 10대 소녀와 귀족의 혈통으로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영국인 정치가 아빠의 만남은 두 나라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얼마나 다른 문화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2000년대 초반 영화라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대조적으로 비추어지는 두 나라의 모습이 흥미롭다. 헨리의 친딸인 대프니와 그의 의붓딸이 될 클라리사의 모습을 마치 두 나라를 선과 악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은 좀 진부한 연출이다 싶지만, 약간은 고지식하고 깍쟁이 같은 게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모습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딸을 만나게 된 헨리와 유독 자유롭고 당당한 미국인 딸이 만들어가는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진 후 한 번도 곁눈질하지 않고 살아온 리비와 헨리의 재회에 더 마음이 가기도 한다. 이 영화는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1958년도 작품인 'The Reluctant Debutante'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원작에서도 이 영화에서와 비슷한 미국과 영국의 다른 분위기가 보이는지 궁금하다.




Next

여름 10일 - 12일: 사랑의 여름

작가의 이전글 여름을 위한 영화 31편 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