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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Aug 07. 2021

여름을 위한 영화 31편 04

10일 - 12일: 사랑의 여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네 명사를 사랑 앞에 두면 마치 형용사처럼 쓸 수 있다. 봄의 사랑, 여름의 사랑, 가을의 사랑, 겨울의 사랑. 각 계절이 가지는 독특한 이미지가 각 계절의 뒤에 놓인 '사랑'을 상상하게 만든다. 여름의 사랑은 어떨까? 사랑 앞에 여름이 놓이면 그 사랑은 왠지 열정적이고, 무모하고, 오래 지속되지는 않아도 깊이 각인될 것만 같다. 그래서 이번엔 그런 사랑을 담은 영화들을 골라 보았다. 여름의 햇살처럼 따갑게, 그리고 그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잎처럼 풋풋하게 사랑을 만들어가는 두 사람. 여름의 열기가 식고 나면 그 사랑도 같이 식어버릴지 모르지만, 누가 또 알겠는가. 평생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지문처럼 남을지도.


썸머 85 Été 85, 2020


감독 프랑소와 오종 François Ozon

각본 프랑소와 오종 François Ozon

출연 펠릭스 르페브르 Félix Lefebvre, 벵자망 브와장 Benjamin Voisin, 필리핀 벨쥬 Philippine Velge

1985년, 프랑스의 바닷가 도시에 살고 있는 16살의 소년 알렉스는 이제 막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죽음에 관심이 많은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상담 선생님은 문학수업을 권유하기도 한다. 어느 날, 친구 크리스의 배를 타고 나갔다가 폭풍우가 몰려오는 바다 한가운데에 표류하게 된다. 그가 뒤집어진 배 옆에서 허우적거리며 당황하고 있는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배가 서서히 다가와 그를 구해준다. 그는 18살인 다비드로,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를 물려받아 엄마와 운영하고 있다. 다비드는 물에 빠져 홀딱 젖은 알렉스를 집으로 데려가고, 두 사람은 그날로 친구가 된다. 다음날 다비드는 알렉스에게 헬멧을 선물하고 두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놀이공원에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알렉스에게 배를 빌려주었던 크리스를 만나고, 배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이들은 싸움이 붙게 된다. 알렉스와 다비드는 경찰이 출동하자 현장에서 달아나고 밤늦게 다비드의 집으로 가 싸움으로 생긴 서로의 상처를 닦아준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보내게 된다. 또한 이날 알렉스와 다비드는 누구든 한 명이 먼저 죽는다면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무덤에서 춤을 추자고 맹세한다.


이 영화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이 에이단 체임버스(Aidan Chambers)의 소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Dance on my grave)'를 직접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는 현재의 알렉스와 과거의 알렉스를 교차로 보여준다. 매우 불안정한 모습으로 경찰에 붙잡혀 걸어가는 알렉스는 '그날의 일'에 대해 추궁받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날의 사건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고, 살인일까? 자살일까? 사고일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현재의 알렉스의 상태와는 전혀 반대인 파란 하늘과 투명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1985년의 여름을 보여준다. 죽음에 관심이 많았던 16살의 알렉스는 그해 여름 다비드를 만나면서 사랑과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다비드와 6주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랑의 충만함과 그 충만함 만큼 커다란 상실감을 경험한 것이다. 1985년의 여름, 알렉스에게 다가온 이 사랑은 16년 인생 동안 그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고, 그 이후 그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여름의 노르망디 해변처럼 한없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그 사랑은 끝이 났지만, 그 기억과 느낌은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Luca Guadagnino

각본 제임스 아이보리 James Ivory

출연 티모시 샬라메 Timothée Chalamet, 아미 해머 Armie Hammer, 마이클 스툴바그 Michael Stuhlbarg, 아미라 카자르  Amira Casar, 에스터 카렐 Esther Garrel

1983년 여름, 이탈리아 북부의 어딘가. 17살의 엘리오는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고고학과 교수인 엘리오의 아버지는 늘 그렇듯 올해 여름에도 대학원생을 한 명 선정해 이곳에 인턴으로 초대한다. 올해에 도착한 사람은 24살의 미국인 올리버이다.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옆방으로 옮겨간다. 올리버는 잘생기고 자신감 있는 젊은이로, 이내 동네 사람들, 그리고 엘리오의 친구들과도 친해지며 이곳 생활을 누려간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크레마 시내로 안내하기도 하고, 같이 동네 술집에 같이 가기도 하지만, 늘 '나중에 봐'라며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그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늘 올리버를 찾고, 올리버가 키아라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아버지와 함께 유물 발굴 장소인 가르다 호수에 가기고 한 날, 엘리오는 자신의 질투심을 가장하고자 올리버와 말다툼을 벌이게 되지만, 어색하던 두 사람의 사이는 가르다 호수의 푸른빛 앞에서 이내 사그라들게 된다. 올리버를 향한 엘리오의 감정은 점점 커져가고, 비가 오던 날, 엄마가 읽어주는 기사 이야기를 듣던 엘리오는 자신은 절대 자신의 감정을 먼저 말하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러나 올리버와 함께 시내에 나가게 된 엘리오는 먼저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근래 들어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아닐까 한다. 대략 15번 정도 봤나?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한때는 대사를 거의 외우기까지 했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그 설렘과 아련함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이라 잘 모르겠고, 그래서 헷갈리기만 하고, 그래서 망설이고. 그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연기하는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케미가 너무 찰떡같아서 그 감정을 더 많이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안드레 에치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모리스', '남아있는 나날', '하워즈 엔드' 등으로 유명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직접 각색을 맡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사실 각색보다는 연출에 더 박수를 쳐주고 싶다. 영화에 들어갔으면 했던 대사들이 각색에서 빠진 것인지 편집에서 빠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어보니 그 부분이 많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봉 감독 못지않게 디테일하기로 소문난 감독이라 그런지 촬영 장소가 된 빌라와 실내장식, 주인공의 옷, 손에 들고 있는 책 하나까지 매우 정교했다. 그가 수퍼바이저로서 선곡한 곡들 또한 마찬가지. 이러한 것들이 영화를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게 해주는 요인인 것 같다. 감독은 아미 해머와 티모시 샬라메와 함께 후속작을 준비한다고 했었는데, 2019년 가을에 발간된 안드레 에치먼의 후속작 'Find Me'를 가지고는 만들기 어려울 듯하다. 시간차가 좀 있어서. 그런데 그것 말고도 후속작은 여러 문제로 현재로선 취소된 듯하다. 살짝 실망했는데, 어쩌면 이 영화를 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Richard Linklater

각본 리처드 링클레이터 Richard Linklater, 킴 크리즌 Kim Krizan

출연 에단 호크 Ethan Hawke, 줄리 델피 Julie Delpy

유럽 한복판을 달리는 기차 안. 프랑스인 셀린느는 통로 건너편 좌석에 앉아있는 독일인 부부가 말다툼을 시작하자 읽던 책을 접어들고 짐을 챙긴 후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자 그녀가 옮기 좌석의 통로 건너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미국인 제시가 그녀를 힐끔 쳐다본다. 셀리느 또한 그를 의식한다. 독일인 부부가 마침내 객차에서 나가자 제시가 먼저 두 사람이 왜 싸우는지 아느냐며 셀린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식당칸으로 옮겨가 대화를 이어간다. 부다페스트에 계신 할머니를 방문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셀린느와 마드리드에 있던 여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비엔나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시. 두 사람은 식당칸에서 대화를 이어가다 비엔나에 도착하고, 제시는 셀리느에게 함께 내릴 것을 제안한다.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비포 선라이즈'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단한 서사가 있거나 극적인 장면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소소한 대화 가운데 오고 가는 미묘한 감정이 나를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 처음 서로를 발견할 때 건네던 작은 관심의 눈길, 식당칸에서 대화하던 중 오고 가던 '처음이라 어색하지만 이 대화가 싫지 않다'라고 말하던 눈빛, 트랜 뒷 좌석에 앉아 서로에 대한 질문과 답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서로와 가까워지고자 하던 눈빛, 그리고 'Come here'라는 노래를 부르며 주고받던 서로를 원하는 듯한 눈빛. 이 모든 미세한 감정이 장면마다 느껴져서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늘 설렌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사건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 이어지는 이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유럽 배낭여행에서의 로맨스를 꿈꾸게 만든 결정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20대의 셀린느와 제시는 그렇게 해가 뜨기 전, 6월 16일의 단 하루를 보내며 비엔나 곳곳에 자신들의 추억을 흩뿌려둔 채 헤어진다. 그리고 9년 후 파리의 서점에서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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