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확률은 수학인가 우연인가 인연인가
누군가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예를 들면
강남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
서울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
한국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
치앙마이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
중 어떤 것이 가장 확률이 높을까?
치앙마이에서 친했던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님만해민에 있는 야외 쇼핑몰에서 재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던 그 후배는 하얀 피부에 큼직한 이목구비만은 그대로여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면 그만이지 싶어 냅다 이름부터 불러 재꼈다. 15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로 2번 더 만나 함께 밥도 한 끼 먹고 가볍게 맥주도 마시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5년 전의 나였다면, 멀리 가지 않더라도 1년 전의 나였더라도 그곳에서 그녀를 그리 힘차게 부르지 못했을 거 같다. 실제로 나는 2019년쯤 여기에 한 달 살기로 와있을 때 첫 수습을 하던 부서에서 꽤나 친목을 도모했던 선배를 봤지만 달려가 아는 척하지 못했다. 타지에서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는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너무 쭈글스럽고 초라하게 느껴져 선뜻 아는 척하기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이렇듯 타인과의 관계 또한 시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상대방 또한 나를 기억할지 못할지,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아닐지 등 나의 존재만 증폭되어 느껴질 때 사람 간의 순수한 가교는 흔들린다. 내 마음이 지옥이면 그도 지옥에서 만난 것에 불과하고 내 마음이 천국이면 둘은 벚꽃 휘날리는 곳에서 조우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가장 최악은 나만 지옥이고 그는 천국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다. 그러면 자신은 지옥보다 더 깊고 어둡고 아픈 곳으로 끝도 없이 떨어져 버린다.
내가 눅눅한 몸을 따뜻한 햇빛에 보송하게 말리고 있을 때 후배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기미가 올라온 민낯을 드러내고 자라에서 90% 세일 때 산 옷을 입고 있어도 스스로 누추하다 여기지 않고 밝게 후배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5년이 지나 아는 척해도 괜찮을 정도로 과거에 서로 낯 붉히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 또한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가 진상 선배는 아니었다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후배를 만나게 될지 자주 연락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혹여 그렇게 인연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20대를 함께 했던 우리가 마흔이 넘어 외국에서 우연히 만나 추억 한 조각을 함께 엮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게 기억될 듯하다. 다만 오랜만에 알코올이 들어가 신이 머리끝까지 나서 근처 클럽 음악이 꺼질 때까지 붙잡아 둔 선배가 부디 추한 모습으로 남지 않았기를.
(oo아! 우리 클럽에 있던 20대도 다 이겨 버렸어!라고 헛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우연히 컴퓨터에서 20대 때 사진을 봤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예쁘지도 세련되지도 않아서 깜짝 놀랐다. 팽팽하고 윤기 있는 피부를 제외하곤 지금보다 딱히 더 나아 보일 것도 없었다.(혹시 그게 전부 인 가요?) 언제나 너무 멀리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울적했는데 사진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냥 나였다. 가끔은 잘나고 가끔은 못나고 가끔은 슬프고 가끔은 기쁜,
앞으로도 그럴 그냥 나.
PS. 여러 가지 일신상의 변화로 후배 또한 자존감과 자존심, 자의식 그 어딘가를 조금 헤매는 것 같아 보였는데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넌 과거에도 너였고 지금도 너고 앞으로도 그냥 너일 거라고.
쉬이 굽어 가지 않고 대차게 밀치고 나가며 상큼하게 찡긋 웃어 보일 수 있는 그런,
귀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