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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스트를 때려치우기로 했다

금색, 은색, 검은색 다 내 거예요! 내 거!!

by Jane C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모두 니돈니산 하거라!"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로 자청하며 산지 어언 10년이 넘어간다. 너무나 뒤늦게 그것이 우울증 증상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원인은 모른 채 시간을 보낸 결과 내 주변은 아주 깨끗하고 평화롭게 정리되었다.(앞서 게재한 글 '프라다 구두를 단돈 3만 원에 판 사연'를 소환합니다)

http://brunch.co.kr/@happyfinder/18


그렇다고 아주 헐벗고 사는 것은 아니다. 스타일링할 때 추가하면 좋을 아이템이나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필요한 것들은 세일 때를 기다리거나 아웃렛을 이용하여 구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주로 플랫이나 옥스포드화를 신었는데 이제는 운동화를 자주 신게 되어 나이키 코르테즈나 아디다스 지젤 같은 클래식 운동화 두세 켤레를 들였다. 클래식한 스타일만 입다 보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자라 '끝장' 세일을 기다려 트렌디하거나 포인트가 될만한 아이템을 구입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 또한 기분이 아주 좋을 때의 이야기다. 대개는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없이 보내는 날들이 많다.


치앙마이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이곳은 리넨이 유명해서 일명 '치앙마이 리넨'이라 불리는 도톰한 거즈 비슷한 패브릭으로 만든 패션 아이템이 많다. 그리고 더운 나라답게 화려한 프린트의 의상 또한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모두 사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조촐한 아이템들을 살뜰히 돌려가며 입다가 땀에 흠뻑 젖어 복구가 불가능한 아이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가려고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계획을 망치는 것은 십중팔구 부풀려진 '욕망'때문일 경우가 많다.



작년 11월 경, 아이들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치앙마이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들른 쇼핑몰에서 젤리 슈즈를 하나 보았는데 디자인도 괜찮고 착용감도 좋았다. 오랜만에 사고 싶은 게 생겼다. 그 브랜드가 겨울이면 50%까지 세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시 들어와서 골드, 실버 두 켤레를 한 켤레 가격으로 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더랬다. 하지만 겨울에 다시 이곳에 왔을 땐, 딱 그 디자인을 뺀 나머지만 세일을 했다.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 신발이 요즘 가장 핫한 브랜드인 '더 로우'의 젤리 슈즈를 거의 똑같이 카피한 것이라는 알게 되었지만 카피품을 산다는 부끄러움보다는 나의 녹슬지 않은 안목에 대한 뿌듯함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 신발을 사서 신겠다는 일념으로 유일하게 가지고 온 매쉬 샌들의 엄지 부분이 뚫려 나가기 일보 직전, 30% 세일을 한다기에 하나라도 먼저 사서 신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더 로우'의 마라 플랫과 내돈내산 한 금은동 젤리 슈즈. 둘이 비슷한가요? 둘 다 플라스틱 장바구니 같다고요?


가장 사고 싶었던 건 실버! 하지만 어디에도 내 사이즈는 품절이었다. 게다가 이건 20% 밖에 할인하지 않는데도 다 팔렸단다. 마침 골드는 하나 남아 있었고 30%까지 세일을 한다기에 냉큼 구입했다.

골드를 하나 사서 신었는데도 어딘가 허전했다. 원래 실버를 살 계획이었고 가격이 맞다면 함께 사는 게 골드여야만 했다. 더 로우에서도 메인 컬러가 실버였단 말이다! 그렇게 채워지지 못한 욕망의 시간은 계속되었고 그러다 브랜드의 인터넷몰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실버의 재고가 남아 있었다! 겨우 20% 할인된 가격으로 사는 것도 억울한데 배송비까지 내야 한다니 결제창을 몇 번이나 새로고침 했는지 모른다. 내가 노트북을 여러 번 여닫는 모습을 본 남편이 한마디 한다.

"실버 사는 거야? 나는 블랙이 더 괜찮던데..."

"블랙도 괜찮긴 했지... 실버 하나 사면 배송비 붙는대."

"그럼 실버도 사고 블랙도 사면되겠네. 고무로 된 신발 뭐 얼마나 오래간다고. 신다 보면 금방 닳지."

(응?? 역시 당신은 이럴 땐 현자!)


그 순간 '그래, 이렇게 오랜만에 사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좋은 징조야. 이럴 때 맘껏 사보는 것도 괜찮지.'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살짝 들렸던 것도 같다. 홀린 듯 실버와 블랙 두 개를 모두 주문하고 어딘가 치료된 듯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우울증 완치의 증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이틀 후 DHL로 신발 두상자가 배달되었다. 분명히 안달복달하며 겨우 샀는데, 분명히 너무 예쁜데...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골드, 실버, 블랙 젤리 슈즈가 산신령이 준 것 아닌 '내돈내산'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처럼 구석에 놓였다. 살 땐 당장이라도 모두 꺼내 신을 것 같았지만 웬일인지 쉽사리 상자에서 꺼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한 켤레면 족하다는 것을. 미니멀리즘은 더 이상 내 우울증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젠 내 생활 방식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3년 전 작은 시누이가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른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내가 짐정리를 맡았는데 문제는 짐이 너무 많았다. 시누이는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참 많은, 그야말로 에너제틱한 사람이었다. 옷도 많아 12자 장롱 한가득이었는데 이마저도 너무 빽빽하게 꽂혀 있어 통기가 잘 되지 않아 곰팡이가 선 것들도 더러 있었다.

물건들을 정리하며 내내 슬펐던 기억이 난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이렇듯 많은 미련을 남겨둔다는 것이, 우리는 내 손으로 내 것조차 다 거두고 가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남아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미처 생의 날을 다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시누이의 뒷자락 같아 마음이 아렸더랬다. 그때 더 단단히 결심하게 됐던 것 같다. 살아가는 날들에 많은 것들을 남기지 않기로.




넘쳐나는 물건들에 치이는 일 없이 산뜻하게 살아가고 싶다. 이런 다짐이 고작 젤리 슈즈에 무너지고 말았지만 오히려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까탈'스럽게 욕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병들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변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언젠가 조금씩 진화하지 않던가.


"엄마, 이거 제 발에도 대충 맞는데 가끔 신어도 돼요?"

요즘 제법 발이 커져 나와 한 사이즈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딸아이가 쌓인 젤리 슈즈를 신어 보며 말한다.

"너 신고 싶은 색깔 아무거나 신어."

딸아이가 신이 나서 이 색깔 저 색깔 슈즈에 발을 넣어 본다. 40대에서 60대까지 세대별로 한 켤레씩 신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아이가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기도 하고 언제 저리 컸나 대견하기도 하다. 최근 아이들은 부쩍 멋 부리기에 관심이 늘었는데 내 액세서리나 옷 등을 보고 '나중에 이거 저 주세요' 할 때가 많아졌다.(더 어릴 땐 나중에 대신 '죽으면'이 붙었었는데 요즘 그 말은 떼어졌다.)


앞으로 무엇을 하나 사게 되더라도 '아무거나'가 아닌 아이들이 탐낼 정도로 예쁘고 가치 있는 것으로만 골라야겠다. 언젠가 주변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면 누구든 '저요 저요'할 법한 그럴싸한 아이템 몇 개만 알차게 남겨 놓으리. 그러기 위해서 방심하지 말고 더욱더 예리하게 '안목'을 세우고 더욱더 견고하게 '취향'을 쌓아야겠다 마음먹는다. 내 성공적인 미니멀 라이프를 위하여!




PS. 젤리슈즈는 결국 딸아이와 언니에게 하나씩 주기로 했다.

맥시멀리스트인 언니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우선 신어는 볼게'라며 몇 번 신다가 또 산처럼 쌓인 신발 틈에 끼어둘 것이 분명하지만. 이로써 나의 미니멀리스트 일탈기는 일주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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