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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빵'은 넣어두세요

'노빵'의 도시, 사바이사바이

by Jane C

"สบาย สบาย"

사바이 사바이: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자



남편은 느긋한 편이다. 보통 외출할 때 남편들은 금세 준비를 마치고 아내들을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대게 우리 집은 반대다. 급한 성격인 데다 이제는 화장도 하지 않아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외출 준비를 끝내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화장품이 흡수될 때까지 몇 번을 두들기고 또 겹 바르느라 항상 늦는다. 얼마 전 남편이 내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고장이 나서 현지 AS센터를 가야만 했는데 문 닫는 시간이 채 1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맘이 급한 내가 동동거리고 있는데 2층에서 '톡톡톡톡'소리가 나길래 올라가 봤더니 이 와중에 남편이 선크림을 덧바르고 있는 게 아닌가! 손에 쥔 핸드폰을 면상에 던지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현대인의 교양머리를 붙들어매어 몹쓸 상황을 면한 적도 있다.


이런 남편이 유일하게 급한 것이 바로 운전이다. 운전할 때는 잠깐 머뭇거리거나 천천히 가는 차를 1초도 못 보고 바로 '뭐 하노~!' 하는 격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런 점에서 치앙마이는 여러 모로 남편을 속 터지게 하는 곳이다.

치앙마이에서 들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동차 경적소리. 여기 사람들은 여유로움은 운전할 때도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앞에 있는 차가 거의 서다시피 속도를 낮추고 어리바리해도, 옆 차선 차가 갑자기 얄밉게 끼어들기를 해도 절대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그저 뒤에서 기다려주고 흔쾌히 자리를 내어준다. 신호가 바뀌면 차량끼리 붙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여기는 앞차와의 간격은 넓게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혹 옆 차선에서 끼려고 해도 다 끼어주기 때문에 좀처럼 빨리 빠지지 않는다. 한 번은 우회전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사고가 났나 했는데 알고 보니 맨 앞차가 출발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이러니 운전할 땐 오로지 '경상 바이브'인 남편 속이 부글부글 끓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밤에 올드타운 쪽을 갈 일이 있었다.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밤눈이 어두워진 데다 올드타운은 성벽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게 되어 있어 밤엔 이 곳을 운전하기 조금 꺼려한다. 게다가 이 날은 비까지 내려 주위가 더욱 어두웠다. 우회전을 하려는데 갑자기 길을 건너려는 도보 여행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놀란 남편이 핸들을 급하게 틀면서 옆 차선을 침범하게 되었는데 차가 오고 있던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순간 그 차에서 경적이 울렸는데 '빵빵'이 아니라 '디리리리~~'하는 작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마치 실로폰으로 부드럽게 음계를 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차는 감미로운 경적을 한번 울린 뒤 평화롭게 우리 차를 지나쳐 갔다. (옆에 차를 멈춰 세우고 창문을 내려 '미쳤냐?'며 욕하고 그런 거 없다.) '빵'이 없는 '노빵'의 도시 치앙마이에서는 빵이 필요가 없어서 급기야 듣기 좋은 음악으로 개조해 놓은 차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한국에 '빨리빨리'가 있다면 태국에는 '사바이사바이'가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즐겨라'라는 의미로 안부를 묻는데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좀처럼 화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알고 보니 태국인들은 화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속에 악마가 있다'라고 생각하여 늘 경계한다고 한다.

'사바이사바이'를 하다 보면 순간 불끈 솟으려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 안의 악마를 불러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급하고 화난 마음이 앞서 '보복운전'이라는 단어까지 있는 한국의 운전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앞서 일을 계기로 치앙마이 도로 사정을 보는 남편의 시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융통성 없고 운전 못하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웬만한 건 너르게 이해해 주는 곳'으로 바뀌었다. 부처님이 '일체유심조'를 괜히 말씀하신게 아니다. '사바이사바이' 하다 보면 세상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던 천국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운전하다 지 성질 채 못 버리고 '또 뭐 하고 앉았노~!'를 외치는 남편 옆에서 주문을 걸 듯 말한다. 사바이사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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