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인생 사진

by 해피가드너



젊은 시절, 나는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가 일본 출장길에 사다 주신 올림퍼스 카메라는 보물 1호였다. 24장짜리 필름을 넣으면 48장이 나오는 요술 방망이 같은 작고 예쁜 카메라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찍어준 사진은 느낌이 좋다며 인기였고, 나 역시 렌즈 너머의 세상을 담는 게 즐거웠다. 앨범 속 젊은 나를 보면 '무슨 용기로 저런 포즈를 취했나' 싶을 만큼 당당하고 생기가 넘쳤다.


결혼하고 엄마가 되자, 카메라의 렌즈는 오직 아이들만을 향하기 시작했다. 앨범이 온통 그들의 성장 기록으로 도배되면서 내 사진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 그마저도 뜸해졌다. 나이 들면 사진 찍히기 싫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 찍는 일이 어색하고, 점점 나이 들어 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퇴 후,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오랫동안 잊었던 '사진 찍기'의 즐거움이 다시 생각났다. 평범한 삶이지만, 더 늙기 전에 '나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버킷리스트 1순위로 '인생샷 찍기'를 정하고 막연히 그런 날이 오길 기다리던 중, 뜻밖의 계기가 찾아왔다.


2년 전 새해 첫날밤이었다.

'ㅋㅋㅋㅋ' 딸에게서 온 카톡에 아무 설명 없이 웃음소리 네 글자만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스마트폰 화면 위로 '뉴욕-칸쿤' 행 비행기표가 떴다. 한참 '엄마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던 나에게 기분 전환하라며 사위가 보낸 깜짝선물이었다. 가슴은 뛰었지만, 좋은 호텔에서 그저 쉬다 오는 여행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딸에게 제안했다. "이번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하나 하는 건 어때? [인생 사진 프로젝트] 같은 거 말이야." 당연히 딸도 오케이. 그렇게 우리는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칸쿤으로 떠났다.


칸쿤의 옥색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투명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여행을 떠나기 전 딸이 선물해 준 하얀 드레스를 꺼냈다. 평소라면 "이 나이에 무슨 주책이냐"며 손사래를 쳤을 옷이다. 하지만 이곳은 나의 과거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낯선 땅. 그리고 나는 이제 '자유인'이라는 직함을 단 은퇴자가 아닌가! 과감하게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은퇴 후 첫 번째 놀이를 위한 무대 의상으로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피아노 연주를 위해 무대에 서는 것처럼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이 느껴졌다.


드디어 결전의 날. 칸쿤 도착 튿날 새벽, 우리는 일출을 보며 사진을 찍기 위해 카리브 해안으로 나갔다.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에서 서서히 연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윽고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울려 퍼지듯, 장엄하고 웅장한 순간이었다. 날씨가 좋아야 이런 장면은 볼 수 있다는데 운 좋게도 그날이 그랬다. 마치 자연이 나에게 인생 2막을 축복하는 선물 처럼.


칸쿤의 일출


"엄마, 저기에 서 봐! 아니! 좀 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보라고!" 딸은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에서 열정적인 사진작가가 되어 주문을 쏟아냈다. 평소라면 내가 딸의 모습을 담느라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카메라는 딸에게 맡기고 나는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바닷바람에 날리며, 마음껏 포즈를 취했다. 일출과 파도. 그리고 그 속에 서 있는 나. 핸드폰을 누를 때마다 카메라 앞의 '나'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한바탕 촬영 놀이가 끝나고 딸이 찍어준 결과물을 확인했다. 배경이 너무 멋져서일까, 아니면 마음이 편안해서일까. 사진 속에서 자유분방했던 오래 전의 나를 보았다. 참으로 그리웠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엄마, 이거 진짜 인생샷인데?" 단순히 잘 나온 사진 한 장이 아니었다.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과거와 미래의 내가 겹쳐 보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희망이 동시에 느껴졌달까.


그동안 나는 여행지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려는 강박을 가졌던 것 같다. 쉼표조차도 소홀히 보내지 않으려는 습관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때의 여행은 달랐다. 칸쿤의 햇살 아래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 자신을 렌즈에 담는 행위만으로도 행복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누린 '제대로 노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해보았던.


지금도 가끔 삶이 지치거나 따분해질 때 그날의 사진을 꺼내 본다. 그럴 때마다 평범한 일상이 특별해지고 다시 시작할 의욕이 생기곤 한다. '뭐. 인생이 별거겠어. 하고 싶은 거 해 보는 거지' 하면서. 어쩌다 찍은 인생 사진이 제 몫을 톡톡히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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