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by 해피가드너


정원을 가꾸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볼 때가 있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는데 계절과 햇살, 그리고 바람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이번 한국 방문이 그러했다.


시작은 한 달 전 남동생이 보낸 카톡이었다.

"누나, 설 즈음에 한국에 와서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어?"


가족 여행을 떠나며 혼자 계실 엄마가 못내 마음 쓰였던 모양이다. 첫 책의 출간 작업을 마무리하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하던 일을 다 끝내고 홀가분하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엄마 곁을 지켜온 동생의 수고를 알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운 좋게도 평소 요금의 반값으로 한국행 티켓을 구했다. 별건 아니지만, 출발부터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5시간 30분의 여정. 이 비행시간을 이용해 탈고를 끝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비장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좁은 이코노미석이었지만, 노트북 화면 속 활자들에 집중하니 자리의 불편함도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문장들과 대화하기가 더 수월했다. 나는 편집자라도 된 듯 원고와 사진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는 절박함으로. 역시 모든 일에는 마감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자, 한국 땅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와, 해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출판사로 마지막 원고를 전송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글이 한 권의 책으로 영글기만 기다리면 된다. 바로 친정집으로 향했다.


엄마의 일상을 수리하고

일 년 만에 만난 엄마는 지난해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였다. 서로의 안부가 끝나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꺼내놓으셨다. 먹통이 된 핸드폰, 음식 배달 앱, 그리고 냉랭해진 전자레인지까지. 도움을 청하지도 못한 채 혼자 얼마나 답답해하셨을까. 구순을 넘기신 엄마의 시간은 여전히 느린데, 세상만 빨라진 듯했다.


나는 엄마의 고장 난 일상을 하나씩 수리하기 시작했다. 서비스 센터에 들러 핸드폰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배달 앱 사용법을 무한 반복하며 알려드렸다. 최신형의 에어프라이어를 사드리고 여러 음식을 함께 만들었다. 엄마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이에 출판사에서 책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토록 타이밍이 절묘할 수가.


마음과 마음이 만났다

드디어 내 이름이 박힌 책이 손에 들어왔다. 친정집에 도착한 나의 분신을 보고 또 보았다. 동화 같은 분위기를 담고 싶었던 표지도, 고심해서 고른 내지의 사진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인스타그램과 단톡방에 출간 소식을 알리자, 진심 어린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화면의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과연 받을 자격이 있나 하면서.


보고 싶던 이들도 만났다. 고맙게도 지방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와 준 글 벗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친구들. 수많은 약속이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누군가 나의 하루를 고운 실로 엮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터미널에서, 굴국밥 집에서 나눈 대화와 따스한 눈빛들. 글을 쓰느라 보낸 수많은, 외롭고 긴 시간이 다정한 온기가 되어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3주를 보내고 돌아온 뉴욕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쌓인 창밖을 바라보며 이번 한국 여행을 되돌아봤다.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탈고를 하고, 책이 나오고, 글 벗들을 만나던 순간들. 뉴욕을 떠날 때만 해도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는데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