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단체에서 쓸 로고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디자인을 해본 경험은 없는데 제미나이에 명령하고 수정 과정을 거쳤더니 그럴듯한 결과물이 완성됐다. 심지어 심사에서 제일 많은 표를 받기도 했다. 소품 사진을 찍을 때도 가끔 AI가 연출한 배경을 사용한다. 이제 AI는 검색 기능을 넘어 나의 활동 범위를 무한정 확장해 주는 듯하다. 이 기술이 더 깊이 일상에 들어온다면 과연 어떤 하루를 살게 될까.
2035년 5월. 07:00 AM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깊은 잠을 90분이나 주무셔서 오늘 컨디션은 최고예요." AI 비서인 아라가 깨워주는 아침이다. 아라는 밤새 내 생체리듬을 기록하고 기분 좋게 깰 수 있도록 방 안의 조명을 조절한다. 그날의 심박수에 맞게 추천한 차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09:00 AM
찻잔을 비우고 서재로 향한다. "아라! 어제 구상한 '미래의 고독'에 대한 에세이 초안을 잡아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타 하나 없는 완벽한 문장들이 컴퓨터 화면을 채운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른다. "왜 지우시나요?" 아라의 물음에 나는 짧게 답한다. "네 문장은 매끄럽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단어를 고르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만의 문체로 글을 다듬는다. 비효율적인 시간이지만 '살아있다'라는 느낌이 든다.
12:00 PM
치열했던 글쓰기를 끝내자 아라가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집중도가 높아서 열량 소모가 많았네요. 점심은 뇌 활성화를 돕는 오메가 3 위주의 지중해식 식단을 추천할게요."주방으로 향하자 스마트 오븐은 이미 최적화된 온도로 조리를 마친 상태다. 아라는 내 혈압과 혈당 수치를 체크해 부족한 영양소를 조정한다. 아라가 챙겨준 식사 덕분에 몸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잠시 내려놓는다.
01:00 PM
스마트 글라스를 쓰고 정원으로 나간다. 타샤 투러의 정원을 꿈꾸며 가꾼 1에이커의 정원은 이제 제법 자리를 잡았다. 오솔길을 따라 장미, 수국. 야생화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장미 덤불 위엔 '수분 15% 부족'이라는 붉은 경고등이, 야생화에는 '상태 좋음'을 알리는 초록 등이 켜졌다. 아라가 알아서 해결을 한 덕분에 나의 오랜 로망은 현실이 되었다. 나지막한 나무 벤치에 앉아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는다. 정원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지만 어쩐지 구경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08:00 PM
일과를 마치자 아라가 남편과 나를 배려한 저녁 시간을 마련해 준다. 조명은 편안한 호박색으로 바뀌고, 벽면에는 멀리서 사는 딸들이 실시간 홀로그램으로 나타난다,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이다. 아라는 우리 대화를 듣고 작년에 함께 한 가족 여행 영상을 보여준다. 따뜻한 배경음악 속에서 우리는 물리적인 거리를 잠시 잊은 채 함께 웃고 떠든다. 그리움은 따뜻하게 채워지고 하루는 포근하게 마무리된다.
거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아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마음을 진정시키는 라벤더 향을 분사하며 묻는다. "오늘 하루는 만족스러우셨나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 채 창밖을 내다본다. "아라, 오늘은 이제 쉴게. 고마워." 나직한 명령과 함께 2035년의 화려한 미래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아라 덕분에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완벽한 하루를 미리 여행했다. 그런데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느껴진다.
그게 무얼까.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뒷마당 구석에 핀 분홍 히아신스가 보인다. 슬리퍼를 대충 신고 나가 향을 맡아보았다. 달콤하고 강렬하다. 나는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비로소 숨을 쉬는 듯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