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격차를 넘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
타이틀: 고난을 지나, 나아가는 길
부제: 삶의 격차를 넘어서, 새로운 희망을 향해
크리스마스이브, Sam과 나는 만났다.
나의 특별한 친구 Sam은 Bawburgh Golf Club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곳은 지난주에 골프를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방문했었는데, 그때 학생이 감사의 마음으로 Sam에게 와인을 선물해 주었는데, 골프를 가르치느라고 그곳에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내가 가본 적이 없어서 골프클럽에 관한 호기심도 있고, 가깝기도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 골프클럽은 우리 집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소박한 곳이었다. 그곳은 고급스럽고 도전적인 골프코스는 아니었지만, 18홀과 9홀 코스를 갖추고 있었으며, 시티에서 가깝고 저렴하여 지역 주민 누구나 편하게 이용하는 곳이었다. 골프클럽내부의 카페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그곳만의 따뜻하고 소박한 정겨움이 느껴졌다. 우리가 차를 마시기로 한 공간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삼은 나에게 크리스마스 카드와 초콜릿 한 상자를 건네며 “딸과 함께 나눠 먹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핫초콜릿, 커피, 홍차를 선물했다. 그녀는 “나는 하나만 줬는데, 왜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라며 귀엽게 타박했지만, 나는 웃으며 “숫자가 많아도 가격은 저렴하니까 신경 쓰지 마. 네가 그동안 내게 준 우정과 배려에 비하면 정말 별거 아니야”라고 답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초대해, 그녀의 과거 수준에 어울리는 멋진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가장 큰 선물은 삼과의 대화였다.
삼은 직업이 세 개나 되어 한 주 대부분을 일하며 보낸다. 그래서 우리가 한 달에 한 번 만나더라도, 실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늘 한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의 제약에서 조금 벗어나, 서로의 삶에 대해 깊이 묻고 답할 수 있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깊었으며, 서로에게 정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화 도중 삼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는 쉰다고 했지만, 직업이 세 개나 되는 그녀답게 중간중간 전화를 받느라 대화가 잠시 끊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화를 이어가며, 다시 집중할 수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삼은 원래 금수저 집안 출신의 수재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사립학교를 다닌 후, 런던의 명문대에서 공부했다.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그녀는 마지막 학기에, 그토록 원했던 검사로서의 길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법률이라는 분야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고, 그 갈등 속에서 결국 법관이 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후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며 결혼을 했다. 그렇게 28년을 본인이 꿈꾸던 삶을 살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4년 전부터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남편의 불륜으로 결혼생활이 끝났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반려견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도 같았던 40년 지기 친구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6개월 만에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취미였던 골프마저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되었다.
한때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챔피언에 올랐던 그녀의 화려한 경력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렇게 그녀는 풍요롭고 활기찼던 삶을 뒤로하고, 전혀 다른 척박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으며, 그 힘겨운 시간은 4년이나 계속되었다.
올해 4월, 나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뜻밖의 장소’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녀의 과거 삶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만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삼은 8개월 동안 나를 물심양면으로 돌보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와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이 친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기도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여, 너무 가혹하게 하지 마시고 이제는 그녀에게 조금의 편안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삼과 헤어진 뒤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코니, 나는 그동안 버블 안에서 살았던 것 같아.”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과거 제주 영어교육도시에서 상류층과 함께 살았던 때가 떠올랐다. 겉보기에는 특권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비싼 차들이 오가는 도로에서 오래된 경차를 몰며, 혹시라도 그들이 내 차와 부딪칠까 봐 지나칠 때마다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물론 그들은 무법천지처럼 운전하며 돌아다녔다. 오히려 나는 방어운전을 해야 했다.
제기랄! 사고가 나면 운전 보험 할증료가 어마무시하게 오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런 작은 불편들이 평범한 나의 일상 속에 스며들었고, 그때마다 내 삶과 그들의 삶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지금은 그 기억이 모두 또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나는 평범한 나와 그들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살면서도 체감하는 스트레스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격차를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인 여유와 특권을 자랑하며 살아갔고, 나는 그들 속에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비교하며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버블’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단순히 화려한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속 깊은 고통을 느꼈다. 자녀 교육을 위해 그들이 가진 무한한 재력을 마음껏 쏟아붓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자녀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보면서 나는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격차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제주에서의 ‘버블’ 속의 삶, 내가 겪은 격차와 고통은 내면에서의 갈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영국으로 역이민을 와서 경제적 여유가 부족하고 삶의 질이 떨어졌을 때, 내 정신적인 부담은 더 커졌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는 제주에서 ‘버블’ 속에서 살다가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 이곳에서의 어려움은 내가 본래 속했던 삶으로의 복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에서 공공임대주택단지에 살면서, 나는 더 이상 비교의식이나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예전처럼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느꼈던 부담감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버블 속에서 살았다’는 말은 이제 삼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더 적합한 말이 아닐까? 나도 이곳에서 겪는 어려움과 삼이 겪은 아픔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버블’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나는 이제 그 길을 걷고 있으며, 삼의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와 닮아 있음을 느낀다. 과거의 화려했던 삶은 이제 잊고, 현재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신체적, 정신적으로 보살피며 서로를 응원하리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