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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하던 보노보노 Dec 30. 2023

기분이 가라앉을 때에는 장을 보러 가는 편이 좋다

온라인 장바구니에는 담기지 않는 만족감

인간군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데에는 여러 기준들이 있다.

는 '다른 사람들에게 편협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 너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정도 친밀한 사이에서는 곧잘 농담처럼 그런 기준들을 토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내게 '장보기'라는 주제를 놓고 인간유형을 둘로 나누어 보라면 단숨에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한쪽은 장을 보러 간다는 행위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구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편에 가까운 유형이고, 다른 한쪽은 마치 놀이나 취미활동을 하듯이 장을 보러 가는 일과 나아가 장을 보러 가는 장소 그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는 유형이다.

그리고 물론 나는 후자에 속한다.


수중의 돈이라봐야 부모님께 손 벌려서 받은 용돈 몇만 원이 전부였던 재수생 시절, 유난히 공부도 안 되고 싱숭생숭 엉덩이가 들썩이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가까운 대형마트로 향하곤 했다.

공부를 하러 다니던 도서관 열람실에서부터 걸어서 편도 약 15분. 평범한 주 5일제 직장인으로 사는 요즘의 내 기준에서야 그리 대단치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매 30분, 1시간이 나름대로 세워둔 공부계획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의 내게는 그 한 시간 남짓의 일탈이 어찌나 짜릿하고 신이 나던지.

실은 살 것도 마땅히 없고 돈도 많지 않기에 마트에 간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를 사 오는 것도 아닐 때가 많았다. 단지 카트를 밀고 다니며 이쪽저쪽의 매대를 샅샅이 훑어보면서 어떤 물건이 지금 얼마에 팔리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흥미로워 보이는 신제품이 진열되지는 않았는지, 그러다 혹시 내 구매욕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주머니 속 빤한 이번 달 용돈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의 무언가는 없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았다.

수능공부만 빼고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재밌게 느껴지던 때이기는 했지만 여러 딴짓거리들 중에서도 마트놀이가 내게는 제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십 대 초반의 재수생이던 상황에서야 그래, 달리 할 수 있는 대단한 즐길거리도 없으니 그럴 수 있었겠다 싶다. 하지만 온갖 친구들을 매일같이 만나서 먹고 마시며 떠들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다니던 때에도 나는 늘 장보기를 다른 취미만큼이나 좋아했다.

심지어 제는 그때 그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렇다. 마트놀이가 주는 행복감은 여전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때때로 무언가를 꽤 산다는 점이다. 혼자 먹고 사는 와중에도 어쩌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카트에 식재료들을 주워담는 날에는 10만원이 우습다. 10만원이 다 뭔가. 몇몇 친구들이랑 모여 생일이니 뭐니 무슨 핑계라도 대고 잔치를 벌일라치면 2~30만원어치 먹고 마실 것을 사들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때에는 몇 명이서 양손 가득 짐을 들어 옮기며 이 무거운 것들이 다 우리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무섭지 않냐는 둥 너스레를 떨어줘야 또 제맛이고.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장 보는 것이 즐거운 걸까.

한 가지 힌트가 될 만한 것을 찾자면, 온라인 쇼핑은 즐거움이 덜하다는 점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집어들어 카트에 싣고, 무게감을 느끼며 카트 바퀴를 굴리고, 계산대에 하나하나 올리고, 결제를 하고, 무게와 부피를 고려해 봉투에든 상자에든 차곡차곡 담고, 들어올려 차에 싣고 집에 돌아와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 중 어디에 그렇게나 매료된 걸까.


어쩌다 보니 지난 일 년 동안은 바닷마을에 살며 차로 편도 30분을 달려야만 대형마트든 재래시장이든 갈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더구나 지금은 차도 없어졌고 버스도 하루에 대여섯 번 밖에 다니지 않는 곳인지라 마음 내킨다고 아무때고 불쑥 장을 보러 다녀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장보기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새삼 글로 적어내려가다 보니 어쩌면 그래서, 최근 침울함에 빠졌던 때에 좀처럼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한참을 울적하게 보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소비의 심리학' 같은 분야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리 진지하게 배워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내 자신을 더 잘 알아가고픈 마음으로 새해에 새롭게 공부할 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지금 결심하게 되었다.

새해에는 소비자로서의 마음에 관해 공부하고, 실제 소비하지 않더라도 그 공간 자체를 즐거움으로 여기게 만드는 공급자들의 기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엿볼 수 있는 책들을 찾아 읽어야겠다. 이 난데없는 공부가 내 삶 어디에 언제 기막히게 쓰이게 될지도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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