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을 그렇게 지새우고 다음날이 되니 진통제를 맞으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진통이 잦아들었습니다. 그 효과는 딱 진통제만큼입니다. 진통제가 떨어질 일이 벌써 걱정이 되었습니다.
원래 평소에 통증을 달고 살아서인지 아픈 것에 곰처럼 좀 무디기는 합니다. 역시나 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전에 먹던 편두통약 복용을 물어보니, 처방받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편두통은 고3 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쪽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습니다. 마치 딱따구리가 한쪽머리에 매달려서 콕콕 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통증은 눈까지 내려와서 눈이 빠질 듯이 아프고 환한 빛에 예민해서 방안에 불을 다 끄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다 속이 울렁거리고 안 좋아서 음식냄새도 못 맡고 온종일 물 한잔조차 넘기기 힘이 듭니다. 조금이라도 억지로 먹었다간 다 게워내기 일쑤였습니다. 하루에 10번 이상 토하기도 합니다. 물은 물론 초록색 위액까지 몸에서 다 쏟아내야 속이 좀 편안해집니다.
편두통이 밀려오는 날에는 아무것도 못 먹고 어두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있어야 좀 나아집니다. 이런 고통을 2~3일 정도를 지속해야 겨우 가라앉습니다. 길게는 일주일 이상 투통이 지속될 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이 지속되기 때문에 편두통이 시작될 전조증상이 느껴지면 처방된 약을 바로 먹어야 하루 내에 진통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방에는 늘 편두통으로 처방받은 상비약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렇게 25년을 진통제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제게 맞는 약을 처방해 주는 병원도 15년 동안 다니고 있습니다. CT도 찍어보고 편두통완화 치료도 받아봤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습니다. 편두통은 완치가 아니라 두통의 횟수나 지속시간을 줄이는 완화의 목적으로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와 평생을 함께할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이외에는 먹을 수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람도 쐬고 기분전환도 할 겸 가슴에 삽관, 팔에 링거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1층 로비로 내려갔습니다.
병실은 6인실의 가운데인 제일 좁은 공간에 끼어있습니다. 첫째날은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답답했습니다. 왼쪽에는 온종일 이어폰도 없이 핸드폰을 보는 보호자님의 뉴스소음, 오른쪽에는 수술하신 아프신지 화내거나 징징거리는 아주머니의 소리로 투통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런 숨 막히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우리만의 공간이 1층 로비 커피숍 앞 4인의자였습니다.
진료가 모두 끝나서 한가로운 병원 1층 로비의 할리스커피매장 앞이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낮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띵동 대느라 정신없는 이곳이 오후에는 참 한가롭고 여유롭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대어 유방암에 관한 유튜브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어제 유방외과 교수님께서 어쩌면 항암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애기하셔셔 마음이 참 우울했습니다. "유방암입니다."라고 하신 것보다 더욱 좌절되었습니다.
남편이 왜 그러냐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데도, 왠지 슬픈 마음이 앞섭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 울 식구들에게 얘기해야 할 텐데...
'머리는 먼저 자르고 가발을 쓰는 게 낫겠지? 출근은 할 수 있을까?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이제 정말 어제보다 한결 괜찮은 듯 벌써부터 걱정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여러 생각 때문에 더욱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제발... 항암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우울한 얘기와 심각한 얘기, 또 가끔은 정신 나간 듯 우스운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이쯤이면 조용해졌겠지... 하며 다들 잠들었길 바라며 10시가 넘어서야 병실로 올라갔습니다.새벽 4시부터 시작된 종합병원의 하루는 참 깁니다.
24시간 동안 딱 붙어서 내 아픔을 이해해 주고 내 짜증을 받아주고 챙겨주는 남편이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