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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19. 2020

설레발

이 글이 웃음을 줄 수 있을까?

얼마 전 ‘100세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를 각색해서 올렸는데 반응이 (제 생각에) 괜찮았습니다. ‘점심시간에 밥 먹다가 빵 터졌다’ ‘웃음을 줘서 고맙다’ ‘앞으로 이런 재미있는 글 많이 써달라’는 댓글을 보며 (엄청 부담을 느꼈지만) 기분 좋았습니다. 그 후 2주 동안 올린 글을 보니 재미와도 다소 동떨어진 내용이었습니다. (혹시나 기대한) 브런치 작가분들에게 실망을 드린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없는 건 알지만) 글을 웃기게 쓰는 소질이 있는지 다시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비는 내리고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으니 기분마저 우울합니다. 게다가 코로나 확진자는 더 늘어나고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 이 글에서 빵 터질 거라 예상하는 장면은 딱 1군데입니다(아니거나 없을 수도 있고요). 어딘지 잘 찾으셔서 밋밋한 하루, 크게 한번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진심입니다)

혹시 읽고 나서 재미없다고 하시는 작가님들께는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근거 없는 설레발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출발합니다.

 


I

시험 칠 때면 늘 보던 광경이다.

1교시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 다음 시험을 치기 전 10분 동안 방금 끝난 문제의 답을 맞혀본다.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 2명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두 녀석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 3번이 맞니, 4번이 답이니. 책을 꺼낸다. 필기한 공책을 펼친다. '난 3번 썼는데.' 조마조마하다. 답은 3번이다. 맞춘 학생은 환호를 지르고 틀린 학생은 실망한다. '앗싸. 맞췄다.'며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환희를 느낀다.

곧이어 다른 문제로 넘어간다. 1번이 답이라고 하자 그건 2번이라며 맞선다. 책을 뒷부분으로 넘긴다. 필기 공책도 다른 페이지를 펼친다. '난 2번 찍었는데? 제발' 정답은 2번이다. 두 문제 다 맞혔다. 기분이 좋다. 이번 시험은 언제나 그랬듯이 공부를 안 했는데 시험은 굉장히 잘 본 것 같다. 뿌듯했다.   


성적표를 받으면 결과는 보나 마나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어려워한 문제를 다 맞혔는데도 성적은 제자리다.

이유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어려운 문제는 맞혔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이 신경도 쓰지 않는 평이한 문제는 죄다 틀렸으니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재수 좋게 두 문제 맞혔다고 이번 시험은 잘 봤다는, 성적이 엄청 잘 나올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성적은 정직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뻔한 사실인데 그땐 왜 몰랐을까? 설레발쳤던 학창 시절의 한 장면이었다.



II

내가 좋아하는 프로야구팀은 롯데 자이언츠이다. 전국적으로도 인기가 많은 구단이다.

내가 중학교 때 한국시리즈 우승한 걸 봤다. 그리고 8년 뒤 또 우승했다. 프로야구 출범한 지 10년도 안돼 2번이나 우승했으니 얼마나 강팀인가. 근데 그게 끝이었다. 이후 암흑기를 보냈다. 잠시 반짝한 적이 있었지만 10년 넘게 꼴찌를 도맡아 했다. 언제부터인가 롯데를 보며 우승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가을에 롯데 야구 보는 게 염원이었다. 13년 전 외국인 감독이 와서 'No fear!'를 외치며 분전했다. 그럼에도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그 뒤에도 별반 차이 없었다.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도 없었다. ‘기을에 야구하자’라는 외침처럼 가을에 야구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겨울이면 외국에 나가 훈련을 한다. 스프링캠프 현장이다. 올 시즌을 앞두고 감독과 선수들이 인터뷰를 한 내용이 방송된다.

감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번 스프링캠프에서는 준비가 너무 잘되었다. 선수들의 눈빛이 다르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하다."라고 말한다.

선수는 "선수단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 적이 없었다. 올해는 뭔가 큰일을 낼 것 같다."며 자신감에 찬 목소리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해마다 선수와 감독이 똑같이 했던 말이다.

'에이, 설마'하면서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올해는 가을야구를 할 수 있으려나? 가을 야구의 끝판까지 가려나? 감독과 선수들의 말에 마음은 벌써 가을에 가 있다.


스프링캠프 때의 인터뷰만 들으면 우승이라도 할 기세였다. 시범경기에서 독주를 하며 1위를 했다. 가을 야구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시리즈가 시작되고 초반에 잘 나갔다. '올해는 달라졌구나.' 하는 기대를 현실로 받아들이려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연패는 기본이고 어쩌다 2번 연속 이기는 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기대와 희망을 잔뜩 품게 해 놓고선 여름이 되기도 전에 완전 다른 팀이 되어버렸다. 이미 순위는 저 밑에 처져있었다. 오죽했으면 팬들이 '롯데'를 '봄데'라고 불렀겠는가.  

올해는? 감독도 단장도 바뀌었다. 선두권에 오르지 못하고 하위권에 헤매지 않고 중간 밑에서 허우적거렸다. 팔치올(팔월에는 치고 올라간다)이니 구치올이니 하며 마지막까지 응원했지만 역시나 올 가을도 보따리를 먼저 쌌다.

'가을에 야구하자'며 응원하는 관중들 사이로 장사하는 아줌마도 가을 야구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목에 건 골판지 글에는 간절함을 넘어 애절했다. “가을에 장사 좀 하자!”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다.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를 푸는데 86년이 걸린 셈이다.

시카고 컵스는 더했다. '염소의 저주'에 걸려 100년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저주를 풀고 우승하기까지 한 세기도 더 걸렸다.

롯데는? 92년 우승을 한 뒤로 28년째 감감무소식이다. 문득 '내 남은 생애에 롯데가 우승하는 걸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턴 레드삭스나 시카고 컵스의 저주가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롯데는 저주에 걸린 것도 없는데, 왜 늘 저 모양인지...

롯데 우승? 다른 팀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롯데만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건가?

내년에는 달라지려나? 또 설레발만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III

젊은 여대생이 몸매를 가꾸고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헬스장을 등록했다. 헬스장에는 트레이너가 상주하고 있었다. 알바생이다. 유머가 있으면서도 운동은 엄격하게 시킨다.

살을 빼고 S라인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진 여학생은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헬스 트레이너가 운동하는 법, 기구를 제대로 다루는 법을 설명한다. 바벨을 쥐면 자세를 잡아주고 구령을 붙이며 운동을 시킨다. 러닝 머신에 올려놓고 걷다가 빨리 걷다가, 뛰다가 빨리 뛰다가를 쉼 없이 반복한다. 힘들어도 '한 번만 더!' 숨을 헉헉 거려도 '조금만 더!'를 외친다.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여자는 지쳤다. S라인 몸매도 좋고 지방덩어리까지 쭉쭉 빠지면 금상첨화겠지만 지금 당장은 죽을 것만 같다. 쉬었다 했으면 좋겠는데 트레이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트레이너는 다시 바벨을 들라고 지시한다.

'바벨을 들어서 몸매가 가꾸어지나? 뭔가 이상한데?' 여자는 의심이 들었다. 살 빼고 몸매 가꾸려고 왔는데 씨름 선수나 역도 선수로 만들려는 건 아닌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되는 건 아닌지, 트레이너가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는 건 아닌지 온갖 의구심이 생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자는 트레이너를 째려보며 물었다.

"이러다가 내가 장미란 되는 거 아니에요?"

트레이너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대꾸한다. 그 한마디에 여학생의 설레발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럼, 알바생이 월급 받으면 이건희가 된답디까?"


P.S

 故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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