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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20. 2020

어느 샐러리맨의 월급날

하루를 버티는 힘은 퇴근시간.

일주일을 버티는 힘은 일요일.

한 달을 버티는 힘은... 월급날.


 알람을 꺼버린 시계를 보며 깜짝 놀란다. 허겁지겁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한다. 어제 입었던 옷을 번개같이 걸치고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월급 주는 곳으로.

 상사가 부르면 '넵', 고객이 고함을 질러도 ‘넵’. 큰소리로 대답하며 쏜살같이 뛰어간다. 쏟아지는 일거리를 두말없이 감당한다. 은근슬쩍 하나둘씩 떠미는 잡일을 별말 없이 떠맡는다. 대놓고 몰려드는 뒷일도 군말 없이 처리한다. 월급 주는 곳에서.

 멀리서 그림자만 아른거려도 90도로 깍듯이 인사하고 하품 나는 뻔한 농담에도 두 손이 부서져라 손뼉을 친다. 월급 주는 사장님 앞에서.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마주치는 수많은 눈동자를 피할 재간은 없다. 똑바로 하라는 시선, 알아서 기라는 눈길, 좀 잘해라는 눈빛, 눈치껏 해라는 아님 그냥 꺼지라고 쏘아대는 레이저까지.

 부담감에 숨 한번 크게 쉬는 것마저 조심스럽다. 틀에 박힌 일상을 구르고 굴러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견뎠다. 한 달을 버텼다.  


'이제 사직하겠습니다'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와도,

'이건 제 일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아도,

'더는 못 참겠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화가 치밀어도

보이는 행동은 언제나 한결같다.

'꾸~욱' 참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날만 생각하면 버틸 기운이 난다.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도, 남들보다 더 많이 뛰어다녀도, 욕만 들어먹어도, 밥만 축내더라도 때가 되면 제 시각에 들어온다. 대형사고만 치지 않은 한 이달도 무사히 받는 월급날이다.

 아이를 무럭무럭 키울 밥값이 있고, 혹시라도 나를 호강시켜줄지 모를 아이의 책값이 있다. 이번 한 달을 먹고 살 생활비가 있고, 드리면서 미안한 부모님의 용돈도 있다. 가끔은 우리 식구 호의호식할 외식비도 있고 쥐꼬리만한 월급 꼬리에 묻은 털만큼 모아 저축도 한다. 이날은 한 달 중 가장 뿌듯해지는 날, 그동안 움츠렸던 어깨를 편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잠시나마 기분이 업된다.   


 이날이 오기만 기다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입금과 동시에 카드회사, 통신회사, 보험회사, 은행에서 귀신같이 챙겨간다. 학원도 빠지지 않는다. 아내의 통장이 뒷마무리를 깔끔히 한다.

 이 두 눈으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죄다 빠져나간다. 입금 전이나 후나 잔고는 여전히 바닥을 맴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1달 만에 다시 찾아왔지만 직접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다녀갔지만 미처 만나지 못했다. 왔다간 흔적만 남았을 뿐.


 기쁨도 잠시. 허탈해진다. 다시 버틸 한 달을 바라보면 막막함이 몰려온다. 쫙 폈던 어깨가 도로 움츠러든다.

 내 통장에 꿀을 발랐는지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을 여기저기서 알아서들 가져간다. 받은 곳은 하나인데 나가는 곳은 여러 군데다.

 내 남은 생애에 여기저기서 돈이 막 들어오는 일이 있을까? 그런 날을 기대해도 될까? 부질없는 상상은 기다렸던 월급날이 허탈한 날만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된다. 보람을 느껴야 할 급여 날이 막막한 날만 되지 않아도 좋겠지만 이날마저 없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쏜살같은 달리던 빛의 속도는 해 저무는 동시에 터벅터벅 느리고 지친 발걸음이 된다.

큰소리로 '넵' '넵' 하던 대답은 어둠과 사투를 벌이는 달빛을 보며 '후우~' 길고 긴 한숨이 된다.

부서져라 처대던 손바닥은 즐거운(?) 나의 집에 들어서면 만사 귀찮은 손짓이 된다.  


 제발 딱 한 번만 로또 1등이 되게 해달라는 소망과 하늘에서 돈벼락이 뚝딱 떨어졌으면 하는 상상을 하며 오늘도 발걸음은 월급 주는 곳으로 향한다.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있어도 내 손으로 내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라는 인간을 낳고 키운 늙은 부모의 애절한 눈길,

나라는 인간 하나만 믿고 함께 버텨온 아내의 지친 눈빛,

나라는 인간이 최고인 줄 아는 아이의 올망 똘망한 눈망울까지.

내 어깨에 기댄 가족이기에 오늘도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진다.

고개는 숙이면 되고 대답은 크게 하면 된다. 일에 치여 산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뭘.  



어서 와요.

곧 떠나겠지만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잘 가세요.

하지만 다음엔

좀 오래오래 머물다 가요.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 노래가 애잔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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