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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21. 2020

낙엽이 지는 낭만과 현실 사이

 토요일 아침입니다. 오늘은 구름이 조금 끼었지만 대체로 맑은 날씨로 시작합니다.

 이번 주는 올가을 들어 가장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인 한 주였습니다.  


 지난 주말과 이번 주 초반은 아침저녁에만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었을 뿐 낮에는 조금 덥다고 느낄 만큼 포근했습니다. 활동하기 좋은 마치 10월의 날씨가 이어지는 것 같았죠. 날이 좋으니 깊어가는 가을의 낭만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빨갛게 물든 단풍, 노란 옷을 입은 은행 잎들이 지면서 온통 거리는 낙엽들이 쫙 깔려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에서 사뿐히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며 해맑게 웃는 한 쌍의 연인도 있고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를 따라 한다며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낙엽을 던지며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요, 낙엽을 밟으며 바삐 걷는 사람들도 표정만은 싫지 않아 보입니다.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죠?


 낭만에 푹 빠진 사람들 뒤로 나이 든 아저씨가 보였습니다. 아저씨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는 낙엽을 애써 쓸어 담는 일이었죠. 낙엽이 담긴 커다란 자루가 여러 개 쌓였지만 아저씨의 빗질은 멈추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낭만이 누구에게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벌써 치우면 어쩌라고, 좀 더 놔두면 좋을 텐데.' 아직은 낭만을 즐기고 싶은 1인이 혼자 아쉬워합니다.  


 수요일 낮부터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웬 가을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에는 벼락과 돌풍을 동반한 비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잠결에 베란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요.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는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요. 도로 옆 길가는 물이 차고 넘쳐 도로가 침수되었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사고 난 차량이 꼼짝을 하지 않으니 차들은 깜빡깜빡거리며 일렬로 쭉 서있습니다. 아닌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리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차가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또 다른 사고가 날까 조심조심 거북이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비와 함께 도로를 침수시킨 주범은 다름 아닌 낙엽이죠. 제때 치우지 못한 낙엽이 배수를 막아 때아닌 물난리를 일으켰습니다.

 차는 막혀 빠질 기미가 없고 회사는 이미 지각 확정인 데다 언제 이 도로를 벗어날 수 있을지, 행여 사고가 나지 않을지 조마조마하다 결국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현실의 답답함을 마구 토로합니다.

 '아니, 낙엽은 안 치우고 뭐 한 거야? 비 오면 이리될 줄 뻔히 알면서'

 급기야 마치 낙엽 하나도 제때 치우지 못하는 원망을 이 나라 정부까지 싸잡아 탓을 합니다.   




 사람이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가로수에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 기분 좋게 출근을 했습니다. 창가에 비친 푸른 하늘과 나무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지는 계절을 아쉬워했고요. 길을 걷다 부스럭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철학자가 되어보기도 했었죠. 빗자루로 인정사정없이 쓸어 담기는 낙엽을 보며 차라리 시골이었으면 낙엽 자체가 산이 되어 참 아름다울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루 만에 냉정한 현실에 맞닥뜨렸습니다.

 도로를 막히게 한 낙엽이 원망스럽고 땅에 붙어있는 낙엽을 보면 질기다고 할까요? 떨어질 때와 달리 젖은 채로 아스팔트에 착 달라붙은 낙엽은 보기에도 별로, 낭만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길 막히고 옷 버리고 지각까지. 게다가 하루의 시작을 허겁지겁, 짜증이다 보니 기분도 잡쳤습니다. 너무 현실적인가요?


 근데요. 낙엽이 뭔 잘못이 있습니까?

 낙엽은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 새순으로 돋아나 봄을 알리며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새순을 보며 반가워하며 희망을 노래했죠. 푸른 이파리로 무럭무럭 자라 실록을 만들어 무더운 여름엔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고요. 선선한 가을바람에 붉게 물들어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맡은 임무를 충실히 다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좋다, 허무하다, 칭찬과 탄성을 자아낼 때는 언제고 오늘은 얼른 치워지지 않았다고 투덜대고 있네요.

 입장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만 낙엽은 그 낙엽 그대로인데 상황에 따라 180도 돌변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 보였습니다. 사람은 아이러니한 존재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을비 치고는 꽤 많은 비가 내렸다 생각했는데요. 기사를 보니까 104년 만에 내린 가을 폭우라고 합니다. 어떤 지역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려졌고 폭우로 승용차가 떠내려가는 기사도 나와 있네요.

 이틀 동안의 가을 폭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직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나뭇잎이 낙화 준비를 합니다. 이젠 내 차례다 하면서 말이에요.

 아마 내일이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아름답다. 멋지다 탄성을 또 지르겠죠. 낙엽을 밟으며 낭만도 즐기고요. 저무는 가을, 얼마 남지 않은 낙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 들 거예요. 며칠 전처럼요.  




 낙엽 지는 낭만과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다가오는 겨울엔 또 무엇으로 낭만과 현실을 오갈까요?

 하얀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꿈꾸어봅니다. 거리엔 캐럴이 울러 퍼지고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눈 위를 뒹구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요.

 자고 일어나면 얼어붙은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고요. 행여 넘어지면 이놈의 눈! 하며 짜증 내지 않을까 싶네요. 안 봐도 너무나 뻔한 현실 아니겠어요?


 찬바람이 부는 주말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하니 어쩜 마지막 낭만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며 가을 끝자락의 낭만을 마음껏 느낄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섭니다.

 출발하자마자 도로는 이미 막혀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차창을 내려 가을바람이라도 쐬려고 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워 얼른 창문을 올립니다. 낭만을 즐기려다 감기 걸릴까 봐 걱정합니다.

 역시나 현실은 언제나 냉정합니다. 그래도 낭만은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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