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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Jan 12. 2021

새해 소망이 꼭 있어야 하나요?


 새해가 밝은 지 열흘이 더 지났습니다. 친한 후배 녀석과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다 새해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평소 착실하고 워낙 성실한 후배라 당연히 FM 같은 새해 소망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첫마디가 "새해 소망이 꼭 있어야 하나요?"라고 하네요. 그리곤 말을 이어갑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 소망이 빠질 수 없습니다. 새해 이루고 싶은 소망은 뭔지, 보다 나은 한 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올해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합니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떠오르는 해를 보며 산에서, 바다에서 새해 소망을 빌고요, 어떤 이는 1월 1일 0시에 교회 가서 신년 예배를 보며 빌고요, 혹은 절에서 경건하게 소원을 빌었다는 이도 있습니다.

 새해 소망이 있어도 종교적인 도움 없이 빌면, 해와 달을 보며 빌지 않으면 하다못해 이름도 모르는 조상님을 찾지 않으면 비나 마나 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고요, 새해 소망마저 없는 사람은 정초부터 낙오된 느낌이 듭니다.  


 새해 소망을 들어보면 다들 엇비슷합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에 가고 싶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하고 싶습니다. 취업하면 승승장구, 고속 승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탄탄대로, 일취월장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빠질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나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매일 출근하다 보면 하루 이틀 지각할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졸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눈치 좀 그만 주고요.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월급이나 팍팍 올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는 건강함은 기본이고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도 잘하고요. 모든 방면에 뛰어났으면 바랄 게 없습니다.

 운동을 해도 근육이 불끈불끈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면 몸무게가 팍팍 빠지고 S라인이 멋지게 생기고요, 세 끼 정량만 먹어도 살 좀 안 쪘으면 합니다. 술 몇 번 마셨다고 배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고요. 무엇보다 이 뱃살을 누가 그저 가져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에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당연합니다.

 남편은 건강에 해로운 술과 담배를 끊고 운동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어디서 돈을 왕창 벌어왔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아내는 술 담배보다 건강에 안 좋은 잔소리는 그만 좀 했으면 하고요, 용돈도 듬뿍 주어 남편 기 좀 펴주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돈돈돈, 기승전 돈이니 소원 하나 추가합니다. 올해 로또 1등 한번 맞았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1등! 여러 번은 필요 없고 딱 1번만요!


 이렇게 소원을 빈다면 너무나 이기적인 건가요? 살면서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쯤은 바라곤 합니다. 물론 이루어질 리 만무하고 불가능한 소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 새해 소원을 빈다면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꿈은 클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내가 사는 현실은 냉정합니다. 냉정하다 못해 냉혹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고속 승진, 사업 번창. 지금까지 해당 사항이 없었으니 올해도 소원이라 넣었습니다.

 직장에서 건들지 말라고 바라지만 월급 받는 처지에, 사람과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마당에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버티는 수밖에요.

 아이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줄어듭니다. 어릴 때는 내 아이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머리가 커갈수록 지 밥벌이나 제대로 했으면 하는 소박한 기대로 바뀝니다. 근데 지 밥벌이만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도 요즘 애들한테는 엄청난 부담이라네요.

 다이어트와 운동은 새해 소망이 아니라 평생소원이 되었습니다. S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D 라인인 현실은 지난 오랜 세월 이어온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부모, 형제가 하나도 안 아팠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아파하는 가족을 지켜보는 것이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평안한 가정을 꿈꾸는 소망 역시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있을까, 늘 궁금합니다. 부릅뜬 아내의 눈빛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긴장됩니다. 지독 시리 말 안 듣는 남편 얼굴을 상상만 해도 잔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현실은 냉정하지만 그럼에도 다사다난했던 작년이나 희망찬 새해나 하루도 빠짐없이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직장을 열심히 다닙니다. 남들보다 특출 나지 않지만, 잘한다고 칭찬받은 적이 별로 없지만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밥값을 하며 일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습니다. 아내도, 아이도 특출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이 가정을 무난하게 꾸려왔습니다. 퇴근하면 아이와 놀아주고 집안일도 거들고 삽니다. 술 한 잔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고 폭풍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돈 때문에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요?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이 힘들지만 가족을 위해 버티고요, 가족과 부대껴 지내는 생활이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힘겨울 때 힘이 되어주는 건 가족이니 오늘도 최선을 다합니다.

 틈틈이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챙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남들과도 조화를 이루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참을 인자를 세 번 넘게 새깁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일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새해 소망을 빌고 소망을 이루려고 여기서 또 뭘 더해야 하나요?"

 이렇게 말하는 후배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올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이루지 못한 소망이나 소망 없이 산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하나도 없고요.

 "올해는 소망 없이 살아보려고 합니다.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고 마누라 일 도와주며 직장에서도 늘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합니다."

 드디어 할 말을 찾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사는 건 소망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네? 그것도 소망 아니냐고요? 아이들과 자주 놀고 아내 도와주고 일 열심히 하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겠네요. 그럼 이렇게 정리하렵니다. 하던 일이나 잘하자, 있는 사람한테 잘하자. 그 외 일은 벌이지 말자."


 이렇게 정리하는 후배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뜨겁게 빌었던 나의 새해 소망은 열흘이 지난 지금 벌써부터 식어 갑니다. 빌기는 남들 못지않게 빌었는데 마음에 담아둔 소망은 가물가물해져 후배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하던 일이나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잘하자라고 하는 말. 이보다 더 소중한 마음가짐이 어디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새해 소망이 없어도 충분할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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