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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Jan 25. 2021

겨우겨우... 벌써??

 요즘 수학 학원을 다니는 아이를 보며 놀랄 때가 있습니다.

'겨우 초딩인데 벌써 고등 수학을 해야 한다고?'


 시간이 빠르다는 사실을 하룻밤 만에 실감합니다.

'겨우 잠들었는데 벌써 아침이야? 출근하기 싫다.'


 빠듯한 회사 사정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장님의 한숨 소리가 들려옵니다.

'겨우 이달 월급 안 밀리고 줬더니 벌써 월말이네.'


 '벌써 올해도 다 갔어?'라고 느끼는 연말이면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합니다.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정치권을 보며 일 년 내내 유행어처럼 쉼 없이 들었던 말입니다. 지체 높으신 분들이 ‘서로 너 탓이다’ 하던 행태를 지적한 '아시타비(我是他非)'입니다. 글자 그대로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라는 뜻으로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의미입니다.

 2019년의 사자성어는 '공명지조(共命之鳥)'였습니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라는 뜻으로 서로가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멸하게 되는 '공동운명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정치권이 오죽했으면 이런 말들이 올해의 사자성어일까 싶습니다.  




 교수들이 발표한 사자성어를 읽다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울리는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거창하고 어려워 보이는 한자보다는 '겨우, 겨우'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작년 한 해 진짜 겨우, 겨우 살았잖습니까.

 하긴 삶 자체가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겨우'라는 말을 입에서 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겨우겨우 일어나서 차가운 물로 겨우 잠을 깨고 겨우 학교를 갑니다.

겨우겨우 출근해서 커피 한 잔으로 겨우 정신 차리고 겨우 일을 합니다.

인생이 마치 겨우 먹고살고 겨우 숨만 쉬며 겨우 버티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끊임없이 터지는 스트레스를 못 참겠다 하면서도 참고,

하루도 빠짐없이 닥치는 문제의 연속에 못 견디겠다 하면서도 견디고

사는 게 힘들어 못 살겠다 하면서도 살아내고 버팁니다. 겨우, 겨우 하면서 말입니다.  


겨우겨우 하며 힘겹게 살았는데 시간은 언제 이렇게 흘렸는지 놀랄 때가 있습니다.

겨우 집안일을 다 끝냈는데 벌써 저녁 할 시간이 오고요,

월급 받은 지 겨우 1주일 됐는데 벌써 다 나가고 없습니다.

한 달을 겨우 버틴 것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나가고 새해도 벌써 1달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 겨우 세상을 알듯 말 듯한데 벌써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멀리 보지도 못하고 매일매일 하루를 근근이 사는 삶이 버겁지만 세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과 피로감으로 버티지만 그래도 일상의 정해진 루틴을 유지하느라 정성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겨우, 겨우 하면서 말이죠. 게다가 안간힘까지 쓰다 보면 어느새 옆에 온 '벌써'에 놀라곤 합니다.

 겨우겨우 그리고 벌써.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애착이자 애씀입니다.  


 누구 하나 없어지면 나는 잘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공멸하는 공동운명체라는 뜻인 공명지조. 서로 니탓하며 나만 옳다고 여기는 아시타비. 나라를 운영하는 분들이 이 사자성어를 새겨듣고 겨우겨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애환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속 시원하게 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크게 외쳐본들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내로남불만 떠들지 말고 말입니다.

 아울러 내가 조금 희생하면 사회가 조금 여유로워진다는 배려,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이 험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아닐까 싶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더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막막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고요. 그렇다 한들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입니다.  

 ’겨우겨우’ 버티며 ’벌써’에 놀라지만 그렇다고 고개 숙일 건 없습니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면 되니까요. 또한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겨우겨우 지금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그때까지 잘 버티시기를.

'겨우 그 정도야?'가 아니고 겨우라도 버티고 견디는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겨우, 벌써. 힘들어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는 삶의 이정표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우 1월인데 벌써 2021년 올해의 사자성어를 상상해봅니다.

아시타비, 공명지조 같은 기운 빠지는 말이 아닌 '만사형통'처럼 환하게 웃는 사자성어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다못해 '고진감래'라도 좋겠고요.


오늘도 ‘겨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벌써’가 튀어나옵니다.

오늘이 겨우 월요일인데 벌써 주말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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