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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Jun 21. 2021

빈말이라도 좋다. '다음에 밥 한 끼 하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가끔씩 얼굴을 보며 짧은 인사를 나누는 이웃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나기라도 하면 반가운 표정을 짓지만 몇 마디 주고받고 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헤어지면서 부드러운 억양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다음엔 차라도 한잔하시죠"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와 어색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엄청 친하지는 않으면서 그렇다고 서먹서먹하지도 않아 말없이 헤어지기는 애매한 그런 사이입니다. 그럴 때 이런 말로 마무리합니다.

 "언제 밥 한 끼 합시다."


 예전 학교 다닐 때 알고 지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궁금합니다. 당장 시간을 내어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형편이라 이런 멘트를 날립니다.

 "언제 술 한잔해야지."


 상황이 애매하고 그렇다고 친분이 두둑한 사이는 아니기에 마음에도 없는 말로 인사를 하곤 합니다. 다음에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을 일도, 술 한잔할 일은 아마 없을 거라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흔히 빈말이라고 하지만, 영혼이 없는 형식적인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 잘 살아라. 앞으로 밥 먹거나 차 마실 일 없을 거니까 그냥 안녕이나 하자" 이렇게 인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종종 빈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빈말이란 실속이 없는 헛된 말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거짓말이지만 악의 없이 상대방을 띄워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거짓말 같은 빈말을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기 곤란한 게 현실입니다.


 얼굴에 살이 붙고 배가 나온 상사를 보며 "배가 많이 나오셨네요? 관리 좀 하셔야겠는데요."라고 보이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간 앞으로의 회사 생활은 불 보듯 뻔하잖습니까? 말은 안 할 수 없고 상대방을 띄우는 말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처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야, 얼굴 좋아 보이십니다. 요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술 한잔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물 한 잔도 같이 마시기 싫은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 헤어질 때도 "다음에 밥 한 끼 해요. 벌써 너무 오래됐죠? 만난 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래야 뒤탈이 없으니까요. 속마음 그대로 "너랑 밥 먹느니 집에서 혼자 라면을 먹겠다" 이럴 수는 없잖습니까.


 뻔한 빈말인 줄 알면서도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고, 빈말이라도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애써 노력했는데 반응이 없거나 썰렁하면 “빈말이라도 잘했다고 하면 안 되냐?”라고 푸념하듯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나누는 인사도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변해왔습니다.

 "밤새 별일 없으셨습니까?"라고 인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못 먹고 못 살아 밤사이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밤새 유명을 달리하던 일이 적지 않았던 시절의 인사였습니다. 요즘이야 밤새 별일이 뭐가 있겠냐 싶지만 그 시절은 밤새 무사히 보내는 게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동네 이웃에게 "식사하셨습니까?" 아랫사람에게 "밥 먹었냐?"라는 말을 요즘도 쓰고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굶는 게 일상다반사였던 시절에 나눈 인사를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식사 안 했다고 해도 밥 먹여 줄 형편도 되지 않으면서 말이나 따나 건넨 안부였습니다. “밥 사주지 않을 거면서 왜 물어보냐?"라며 되묻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몇 주 전에 어떤 선배가 밥 사준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라며 투덜대는 젊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잊어버린 건지, 이게 정말 약속이었는지, 그냥 한 말인지 모르겠다면서요. 먼저 연락할까 고민된다고 합니다.

 요즘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인사치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부 인사 표현 방식이 바뀐 거라고 이해하는 게 나을 듯하고요. 요즘 더 어린 친구들은 페메해(페이스북 메시지 해)를 안부 인사로 쓰듯이 말이죠.

 그러니 기성세대가 밥 한번 먹자고 말해놓고는 연락도 없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 밥 한 끼 하자', '다음에 차 한잔하자'. 빈말이라고 서운해하고, 각박한 세상에 정이 메말라간다고 서운해합니다.

 비록 빈말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와 마주친 순간 마음 편히 아는 체를 하고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는 인사라고 받아들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영혼이 실려 있지 않더라도 서로 마음 상하지 않는 이런 인사는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빈말 인사라도 주고받다 보면 실제 만나서 차 한잔할 수 있고요, 그저 그런 관계가 좋은 관계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빈말이라도 좋다'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심한 거짓말이나 정도가 지나친 아부성 멘트는 곤란하겠지만 가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해주는 윤활유가 됩니다. 빈말에도 진심을 담을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도 있으니 진심이 들어간 빈말은 그 자체로도 상대방을 위한 배려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빈말이 서운하게 들리지만은 않을 거고요, 인사 정도로 여겨도 무난할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빈말인 거, 웬만하면 다 알고 있으니까요.




 설령 영혼을 담아 술 한잔하자고 인사해도 상대방은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거겠지 하며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면 자신의 진심을 더 담아서 표현해야 합니다. '다음엔 한잔하자'라는 말도 '진짜 꼭 한잔하자! 이거 빈말 아니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밥 한 끼 하고 싶다면 휴대폰을 꺼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약속을 잡는 게 요즘 세대의 행동이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한 끼 하고 싶다면 내가 먼저 약속 시간을 정하는 게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행동이겠죠. 다만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센스는 잊지 마시고요.


 빈말이라도 자주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빈말이라도 주고받다 보면 마음이 통할지도 모르니까요.

 빈말이라도 좋으니 오늘 누가 나에게 밥 한 끼 하자고 얘기할까요? 그러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약속을 잡을 텐데 말입니다. 밥값은 밥 먹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이 내는 거라고 하니까 은근 기대도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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