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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Dec 02. 2020

매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천당과 지옥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웃고 즐거운 날보다 한숨 쉬며 힘겨운 날이 더 많이 찾아오고요, 어제나 오늘이나 번뇌는 끊이질 않습니다.

 세상 속의 삶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어집니다.  오늘도 그 누구가 태어나 축하를 받고 어느 누가 잠들어 보내는 이의 가슴을 울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고 세파에 시달리고 때로는 병마와 사투를 벌입니다. 인생은 고행의 연속, 사는 건 고해라고 하죠.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이승에서의 힘든 삶이 끝나면 저승에서는 편안하고 행복할 거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고생만 하다 생을 마감한 사람을 떠나보낼 때 “부디 고통 없는 천당에서 편히 쉬어라"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듯이 말입니다.

 천당이 있을까요? 있다면 지옥도 있겠죠. 만약 없다면? 물론 죽다 살아나 봐야만 알 수 있는 물음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 내용 중 하나는 '젓가락을 이용해 어떻게 음식을 먹는가'입니다.

 천당과 지옥 모두 산해진미 같은 음식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면 긴 젓가락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기냐면 음식을 집어도 젓가락이 너무 길어 제 입으로 음식을 넣을 수 없습니다.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맛있게 먹었다고 하죠. 각자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옆 사람 입에 넣어주니 모두 배불리 마음껏 먹었습니다. 다들 잘 먹어서 통통하게 살이 쪘을 거고요. 분위기도 천당답게 좋았겠다 싶습니다.

 반면 지옥에서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혼자 빨리 먹으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음식을 집을 수는 있지만 젓가락끼리 부딪힙니다. 먼저 먹으려고 기를 쓰다가 입에 넣지 못해 흘립니다. 서로 싸움만 벌입니다. 안 그래도 지옥살이에 시달려 비쩍 말랐는데, 다들 뼈다귀에 가죽만 도배해 놓은 듯한 흉측한 몰골이면서도 눈앞에 놓인 음식을 줘도 먹지 못합니다.


 천당은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승에 사는 동안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착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니까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은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지옥의 상황은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살아생전에도 온갖 나쁜 짓만 한 사람들입니다. 사람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며 자기 이익에만 눈먼 사람들이 거저 준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을까요? 옆사람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올리면 맞은편 사람이 가로채서 먹었을 수도 있고요. '네가 음식 먹여주면 나도 먹여줄게' 하며 받아먹고 내 몰라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데 젓가락을 부셔버리고 손으로 집어 먹어도 먹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벌 받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조물주가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마음속에 행여 착한 구석이 남아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한 건지, 아님 착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화창한 날씨가 기본입니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은 사방에 피었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합니다. 아무런 걱정도, 그 어떤 고통도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게다가 이승에서 누리지 못했던, 해보지도 못한 온갖 것들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지상에서는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산해진미를 즐기고요. 화내는 사람이 없고 불평불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낙원, 유토피아라고 믿습니다.


 반면 지옥 하면 가장 먼저 상상되는 이미지는 어두침침하고 으스스한 귀신의 집 같은 분위기입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기이한 소리,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는 살벌한 암흑입니다. 살아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무시무시한 벌을 받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가마에 빠졌다 나왔다를 반복합니다. 피 터지게 얻어맞고 잠시도 쉬지 못하는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어둠 속에 갇힌 채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말라비틀어졌습니다. 사방은 괴물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곳입니다. 제대로 입지 못한 옷마저 찢어지고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몸 곳곳에 움푹 파인 상처가 있고 그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절망스러운 눈빛, 여기저기 터지는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기승전 고통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곳입니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무섭습니다.


 지옥의 모습은 이해됩니다. 이승에서 온갖 나쁜 짓만 골라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천당의 모습은 당연히 좋아 보입니다. 아무 고통도, 아픔도 없이 매일 웃고 즐거워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잠시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영원히 편안하게만 산다면 그런 삶에서 행복이라는 의미를 알 수 있을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고,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고 나서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뜹니다. 어둠이 깊어야만 여명이 찾아오고,  슬픔을 겪고 나서야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압니다. 이건 조물주가 만든 법칙인데 천당에는 왜 없을까요? 스릴도 없고 모험도 없고 도전도 없는 곳이 천당인지 궁금해집니다.

 365일 매일 편안하고 고통이 없다면 행복하다고 느낄까요? 당연함에 길들여져 무미건조, 매너리즘에 빠질 것도 같고요, 지겨워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이승에서 고생한 사람들을 천당에서 푹 쉬게 해 주려는 조물주의 배려는 너무나 감사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나친 호강만 누리다 자칫 도전의식도, 아무런 의욕도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바엔 이승에서부터 고통도 아픔도 괴로움도 없게 만드셨다면 힘들다, 죽겠다며 조물주를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테고 아등바등거리며 살지 않아도 되니 다들 좋아했을 텐데 말입니다. 너무 지나친 상상인가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천당과 지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천당이 있으니 지옥도 있다고 믿습니다.

 한평생을 괴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는 것이 힘들어도 나쁜 짓만, 벌 받을 짓만 하지 않으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천당에서 누릴 축복을 상상하며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악랄한 사람을 만나고 나쁜 일을 당해 고통을 겪어도 힘없는 처지라 어쩔 도리가 없을 때 나를 괴롭힌 인간들을 향해 한마디 외칩니다. "죽어서 지옥에나 가라"라고.

 한없이 착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거나, 어린아이들이 흉악한 범죄에 의해 희생당하면 눈물로 '천당 가서는 꼭 행복해라" 라며 명복을 빌어줍니다.

 각박한 세상에 나쁜 짓하는 인간들, 용서받지 못할 자들, 천일 공노 한 사람들을 향해 '죽어서 꼭 지옥불에 떨어져라'는 말로 스스로 위로를 얻습니다.


 죽어야만 존재를 알 수 있는 천당과 지옥은 지금 살아가는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안되면 괴로워합니다.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지옥이고 원하는 대로 되면 천당입니다."라고 하신 법률 스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이 지옥 같은 괴로움을 불러온다는 의미입니다.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지옥도 천당도 사라지며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내 마음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일상을 살면서 어떤 날은 천당으로 띄워 올려주고, 어느 때는 지옥으로 처참히 떨어뜨립니다. 그게 신이 아닌, 운명의 장난도 아닌 내 마음이 하는 거였습니다.


지옥과 천당은 현재 내가 서있는 여기에 있습니다.

힘들어도 버티며 희망을 갖고 웃을 수 있으면 여기는 천당일 거고요

산해진미 먹고 가진 것이 흘러넘쳐도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입니다.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뜻있게 채우고 비우는 삶의 태도가 지금 여기를 천당으로 만든다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살지 않았나요?

천당과 지옥은 다름없는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매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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