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7. 21세기의 어떤 날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by 한소리

"와 오늘 진짜 안 되는 날이다"


퇴근이 한참 지난 시간 과장이 말했다. 과장은 안그래도 빠듯한 일정 중에 중대한 실수를 해 한차례 혼쭐이 난 상태였다. 한번 당황하고 나니 실수가 실수를 불렀다. 하필이면 가장 무서운 임원에게 걸릴 건 뭐였으며, 제출하라고 했던 처부터 글까지 다 잘못될 건 뭔가. 과장은 그날 10시 야근이 끝날 때까지 실수를 계속했다. 몇 번이고 검수하고 나에게 재검토를 요청했지만 또 실수가 있어 머리를 쥐어싸맸다.


과장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난히 그런 날이 있다. 샌드위치를 떨어뜨리면 잼이 있는 쪽이 꼭 바닥을 향하고, 생각없이 신발을 신지 않고 들어간 화장실 바닥은 젖어있고, 버스 시간표를 보지 않고 나서서 내 눈앞에서 버스가 지나가거나 하는 그런 경우. 모든 불행이 나를 향하는 것 같은 날.


요즘 내 삶이 조금 그렇다. 괜히 누구 탓을 하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다. 누구 때문에 기분이 나빴고, 누구 탓에 실수를 계속했다. 이건 내 잘못이라기보단 저 사람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상황 때문이지 더 잘됐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하지만 이런 날들엔 별수 없다. 불행을 즐겨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또 불행을 부른다. 실수가 다른 실수를 야기하기 전에 이 고리를 끊으려면 실수를 허허 웃고 털어버려야 한다. 긴장한 상태에서 뭔가를 하게 된다면 또 '아이쿠'하고 말 것이다. 며칠 전 우리 과장처럼.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연히 좋은 날도 많았을거다. 출근길에 조금 늦게 나와 횡단보도에 딱 섰더니 곧장 초록불로 바뀌고 버스도 마침 딱 왔다거나, 우연히 어제 밤에 먹고 싶었던 메뉴가 구내식당에 나왔을 때. 소낙비가 내리는데 우연히 가방에 빼지 않은 우산이 있을 때. 아무래도 인생엔 총량이 있어 우연히 운이 나쁜 날이 생기면 운이 좋은 날을 비교해서 하나씩 껴주나보다 싶다.


그런 고로 올해 맞을 고통은 올해 두고 가겠다. 내년엔 이 총량에 맞는 기쁜 일들이 들어오겠지. 너무 정신 없었던 올해 내년을 기대하며 더 멋진 날들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며칠 남지 않은 올해 더러운 것들을 다 올해 두고 가십쇼. 내년엔 누가 뭐래도 멋진 일들만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