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시들은 저마다 시간을 품고 있다
경주에 들어서면 산처럼 흩뿌려진 고분이 나를 신라 시대로 데려간다. 금관을 쓴 왕과 화랑들이 바람결에 스쳐 가는 듯하다. 안동에 발을 디디면 조선 양반의 기품이 공기 속에 배어든다. 서원의 고요와 종갓집의 예법이 지금의 나를 잠시 조선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군산은 어떨까? 25년 9월, 태어나 처음으로 군산에 발을 디뎠다. 강의 일정 때문이었지만, ‘강의만 하고 돌아가면 섭섭하겠다’는 마음에 하루 먼저 도착했다. 군산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성당 빵집 정도가 전부였고, 그 외엔 뚜렷한 정보도 준비도 없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두 시간 반. 군산은 기대하지 않고 찾아간 도시였다. 짐을 풀고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추천받은 식당에서 바다를 보며 회 한 접시 먹은 뒤, 무심히 걷다가 만난 근대미술관·근대건축관·근대역사박물관이 한순간에 일제강점기의 풍경으로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군산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품은 도시였다.
떼 지어 있는 산, 군산. 그리고 아픈 기억들
군산(群山)은 ‘떼 지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금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어귀에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 속에 이미 군산의 정체성이 들어 있다. 곡식이 모여드는 물길, 그리고 바다로 나아가는 출구. 이 지정학적 이점은 군산을 풍요롭게 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아픈 역사의 무대가 되게 했다. 호남평야의 쌀이 군산항에 모여들고,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그래서 군산에는 미곡창고, 조선은행 지점, 일본식 가옥 등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다른 도시보다 짙게 남아 있다.
그런데 군산의 특별함은, 그 아픈 역사가 박물관 진열장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을 드러내며 알리되 극복하며 일상에 녹여내었다. 구 군산세관–근대역사박물관–근대미술관–근대건축관이 이어지는 거리는 언제든 드나드는 앞마당 같다. 담 없는 개방형으로 시민이 편히 쉴 수 있게 해 두었다. 수탈을 위해 세운 일본 제18은행은 근대 미술관이, 일본 상사의 건물은 카페가 되어, 그 사이 길은 편히 걸을 수 있는 골목처럼 만들어 두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담 없이 서로가 연결되어서 혹시 일반인의 집인가 싶어 살짝 눈치 보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렇게 그 일대는 관람지이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일상 무대다. 그래서 군산에서는 과거를 ‘관람한다’기보다, 그 속을 ‘걸어 다닌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 점이 무척 인상 깊었다. 군산은 아픈 기억을 감추지 않고 대신 그 상처 위에 생활과 예술을 얹어, 역사를 시민과 여행자가 함께 살아내게 했다. 그래서 군산을 걷는 순간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풍경 속에 내가 들어 있었다.
말랭이 마을과 이성당의 시간
근대 역사 거리를 지나 젊은이들의 핫플인 월명동으로 들어서니, 서울의 서촌이나 성수동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군산의 명물 이성당 빵집과 히로쓰 가옥 사이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배경이 된 초원사진관이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곳은 말랭이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떠나 폐허처럼 남은 집들을 군산시가 매입해 근대의 아기자기한 생활 추억 공간으로 기획했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둔 지자체가 다른 곳도 꽤 있지만, 대부분 그 공간만 홀로 과거로 회귀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이곳은 도시 전체가 일관되게 ‘근대’라는 맥락 하에 모든 발걸음이 연결되어 좋았다. 말랭이 마을에 홀로 지킴이를 하는 시니어 봉사단 어르신도 어찌나 성심껏 설명을 해주시던지, 그 따뜻함이 인상에 깊이 남는다.
그다음 이성당 빵집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줄을 서지 않아 몇 가지 빵을 먹어볼 수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단팥빵인데 이곳의 단팥빵이 왜 이리 유명할까? 일단 외모부터 달랐다. 진한 캐러멜 갈색을 띠는 다른 단팥빵과 달리 연하고 왠지 야리야리한 느낌이다. 닭요리로 치자면 저온 수비드 요리랄까? 거기에 단팥의 양이 푸짐했다. 군산이 예부터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기에 이성당의 빵에도 그 풍부한 인심이 담겨있는 듯하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 이석우 씨가 기존 일본인의 제과점인 ’ 이즈모야(出雲屋)’를 인수하며 ‘이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씨가 만들어 번성하는 빵집’이라는 의미란다. 그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 ‘빵’은 사치품이었고, 일본인이 하던 가게를 조선인이 이어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민들에게는 해방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 자부심과 기대를 이어받은 이성당이 근대의 한 축에서 시작해 단팥빵으로 역사를 이어온 것이란 생각에 미치니, 이 단팥빵이 그저 빵이 아니었다. 맛을 넘어 그 역사와 장인정신, 그리고 후덕한 인심까지 함께 녹아들어 있는, 구구히 흘러온 역사의 한 단면을 베어 먹는 느낌이 든다. 해방 이후 80년을 변치 않고 이 모양과 이 맛을 이어오는 것이 쉽기만 했을까? 더욱이 사람들에게 외면받지 않고 80년의 세월을 이긴 단팥빵이라니… 이 가격에 사 먹기가 미안해질 정도의 사연을 가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경륜 있는 빵이로구나.
다음 날 나는 군산대학교 새만금 포럼 강단에 섰다. AI 시대의 경쟁력인 ‘공감지능’에 대해 강의했다. 전날 하루 먼저 내려와 군산을 이해한 덕에, 강의실에서 마주한 학생들이 한층 더 가까이 느껴졌다. 단순히 강사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도시를 함께 경험한 따뜻함으로 만난 것이었다.
군산은 강의 때문에 찾은 도시였지만, 내게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경주는 신라로, 안동은 조선으로, 군산은 근대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의 나를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군산은 기억을 걷는 도시. 그리고 따뜻한 인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인 곳이다.
미완의 여행, 그래서 더 그리운
시간이 부족해 두 곳을 못 가본 게 아쉽다.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와 경암동 철길 마을이다.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승려가 지어 해방 전까지 일본 스님들이 운영했지만, 해방 이후 ‘이제는 우리 절’이라는 뜻으로 동국사(東國寺)라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군산이 어떻게 아픈 시간을 받아들이고 오늘의 언어로 바꿔내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같은 공간이다. 경암동 철길마을은 기차가 다니던 철로와 집 사이가 겨우 한 걸음 남짓. 그 철길 옆에서 추억을 소환하는 어린 시절의 놀거리, 간식거리가 다양하게 준비된 곳이다. 우리 세대에겐 추억인 이 놀거리들이 젊은이와 아이들에겐 신기한 역사놀이같이 느껴질 그 공간도 놓친 게 아쉬웠다.
이 두 곳을 위해서라도 따로 한 번 더 와보고 싶다. 군산은 나에게 그런 도시가 되었다. 한 번 걸어본 사람을 다시 부르는, 미완의 이야기들로 가득한 곳.
여행자는 때로 목적지에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는다. 군산이 내게 준 선물은 ‘시간과 화해하는 법’이었다. 아픈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도 모두 오늘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군산이 들려준 가장 따뜻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