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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마라톤, 그리고 달라진 나

왜 달리는지 이제야 알겠다.

by 초록풀


올해 봄, 나는 인생 첫 마라톤을 뛰었다. 출발선에 섰을 때의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총성이 울리자 수많은 러너들이 번개처럼 나를 앞질러 튀어나갔고, 나는 조급해졌다. ‘속도를 더 내어야 하나? 이렇게 가다간 꼴찌가 되는 건 아닐까? 제한 시간 안에 못 들어가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니다. 내 속도로 가자. 내 호흡에 맞게 가자.” 그리고 3km 즈음, 내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앞서 무리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걷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리듬을 잃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첫 마라톤은 나에게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5개월 뒤, 두 번째 마라톤에 참가했다. 9월 21일, 어스 마라톤 10km.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4월까지만 해도 수년간의 PT와 필라테스로 다져진 체력이 있었지만, 5월부터 모든 운동을 그만둔 상태였다. 몸은 금세 정직하게 반응했다. 기록은 1킬로당 6분대에서 7분 후반으로 내려앉았다.


예전에는 “운동해 봤자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며 푸념을 하곤 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보여서 운동을 소홀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뛰면서야 깨달았다. 운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든든한 체력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쌓아둔 근육과 체력이 있었기에 5개월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로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면서 다짐했다. 근력은 물론 러닝 운동을 꾸준히 해야겠다고, 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속도는 느려진 반면, 마음에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두 번째 마라톤에서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장애인이 지치지 않고 달리는 모습, 그 곁을 지키며 발걸음을 맞추는 서포터들의 따뜻한 연대, 유모차를 밀면서도 나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어느 아빠의 뒷모습, 그리고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꼿꼿하게 달려가는 장면. 존경스러운 분들이 참 많았다. 그 모든 풍경이 내게 무언의 응원이 되고 깊은 감동이 되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2만 명의 사람들이 각자 다른 사연과 목표를 품고 달리면서도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의도 한강변 터널을 지날 때,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대한민국 파이팅! “이라는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모든 러너들이 릴레이처럼 따라 외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함께 소리쳤다. “대한민국 파이팅!” 첫 마라톤이 ‘나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면, 두 번째는 ‘함께 달리는 따뜻한 연대’를 온몸으로 체감한 시간이었다.


기록은 많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늘 나는 ‘즐겁게 달리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 10km 참가 이후 하프, 풀코스 마라톤 도전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다른 길을 택하고 싶어졌다. 기록을 단축하는 것에 욕심내기보다는 지금 이 속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 나이는 한 살씩 더해가지만, 오늘의 이 리듬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이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젊고 건강한 삶이 아닐까.


삶은 마라톤과 닮았다. 몸은 그만큼 나이를 더 먹어가니 준비하지 않으면 정직하게 뒤처지고, 꾸준히 쌓아두면 분명히 그만큼 버텨준다. 남과 비교하며 조급해할 필요도, 무리해서 앞서 나갈 필요도 없다. 내 호흡에 맞춰, 내 속도대로, 꾸준히 달리다 보면 결국 내가 가야 할 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 결국 삶의 진리 아닐까?


나는 11월 JTBC 마라톤에 참가한다. 그때 나는 또 다른 풍경을 보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과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마라톤을 마친 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마라톤의 아침


도심 한복판,

하얀 티셔츠 물결 속에

나도 한 사람의 러너가 된다.


함께 달리지만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속도로.


시각장애인 러너도 달리고,

유모차를 미는 아빠도 달린다.

60대 어른도 꼿꼿이 달린다.


그들의 땀이

나의 힘이 된다.


결승선에 서서 웃는 나,

오늘도 나는

나를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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