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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피 Oct 14. 2021

6년 만에 찾아뵌 나의 은사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날을 생생히 기억해요


대학교 때 나는 학교에 잘 나가고 시킨 과제를 열심히 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특별히 뛰어나거나 튀지는 않았지만 시킨 일은 묵묵히 해갔다. 그 당시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하는 게 삶의 모토였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힘든 하루가 있었고 그날은 좋아하는 교수님 수업에 많이 늦었다. 마지못해 출석 체크라도 하려고 간 것이었기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강의실에 도착했다.



아직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그날을 기억한다. 가기 싫은 마음을 꾹 누르고 수업이 끝나갈쯤 강의실에 도착해서 친구들이 다 나가고 교수님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내가 말도 없이 늦었으니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교수님은 그 전에도 학생들을 공평히 사랑해주셨는데 그런 진심을 어린 마음에도 알아채어 어른에게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교수님은 나에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으셨고 나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수님은 펜을 건네시며 종이 위에 도형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심리 상태를 간단하게 말해주는 테스트였다. “지금 너의 심리는 이런 상태야” 라고 말씀해주셨다. 바쁘신 와중에도 짬을 내어 어린 학생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시는 그 마음이 참 감사했다. 대략적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힘들다고 말씀드렸고, 교수님은 본인이 겪으셨던 젊은 날의 힘든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셨다. 교수님을 멋지고 완성된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성장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받아들이니 나의 상황을 좀 더 관찰자로 바라볼 수 있었다. ‘다 지나가는구나. 열심히 살면 언젠가 다 이겨내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많이 표현하지는 않아도 교수님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는 수많은 교수님들과 어른이 계셨지만, 진심으로 한 인간을 아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해가 바뀌어도 교수님 수업을 일 순위로 들으려고 수강신청을 했고 친구를 설득해 공강 날을 맞추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무난했고, 특별한 강점이나 특징이 없는 것 같아 부단히 열심히 살려고 하는 노력형 학생이었다. 그 그룹에 있을 때는 내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다른 의미로 튀는 듯한 이질적인 기분을 느꼈다. 교수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채셨는지 종종 나를 챙겨주시곤 했다.



어느 날은 내게 ‘이렇게 순수하고 해맑은 학생이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꼬’ 이런 무언의 눈빛을 보내시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어서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나는 졸업을 했고, 그 후 5년 동안 2개의 직장을 다녔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교수님께 안부 전화나 카톡을 드리곤 했다.


최근에 퇴사를 하게 되어 한 달 남짓 쉬고 있는데, 교수님께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연차나 반차를 쓰지 않아도 교수님이 계신 학교에 찾아가서 맛있는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연락드려야지 생각하던 즈음에 잘 지내냐는 교수님의 카톡을 받았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퇴사를 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고 쉬고 있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수고했다고 말씀하시며, 그럼 후배들을 위한 전공 역량 강화 강의를 만들어줄 수 있겠냐며 제안을 하셨다. 내가 취업 준비를 했던 시절에 어떻게 준비했는지 그런 노하우들을 후배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소리 없이 방방 뛰고 있었다. 통화 하는 내내 입이 귀에 걸릴만큼 너무 기뻤다. 진로 고민을 하던 3-4학년 때의 나는 막연히 회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문대나 공대 학생들은 회사에 당연히 취업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예술대를 다녔던 나는 실기 위주의 수업과 현장으로 많이 취업하는 선배들을 보며 내가 회사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회사에 간 선배들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변에 있는 동기들도 대개 현장 취업을 희망해서 어떻게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런 고민을 하던 4학년 때 교수님이 회사에 취업한 선배들을 모아 재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실무자를 섭외하여 너희들도 갈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북돋아주셨다. 회사에 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에서 한 번 해볼 수 있겠다고 관점이 바뀐 순간이었다. 먼저 회사에 취업한 선배들을 보며 나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 막연히 언젠가 나도 후배들에게 저 선배들처럼 강단에 서서 내가 이렇게 취업했다고 이야기하고 힘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나의 은사님인 교수님께서 후배들을 위한 취업 노하우, 직장생활 노하우, 앞으로의 방향성 등을 강의로 제작해줄 수 있겠냐고 제안해주셨다. 지난 목요일에는 졸업 후 6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를 방문하여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점심 식사를 했다. 어떻게 강의를 만들면 좋을지 이야기해주셨고, 지난 6년간 어떻게 보냈는지, 얼만큼 발전하셨는지 말씀해주셨다. 비대면 강의 때문에 줌으로 녹화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는데 교수님께 수업을 듣던 때가 생각나서 감회가 새로웠다. 나에게 이렇게 귀감이 되고 좋은 영향을 주는 멘토가 계셨구나 하고 다시 깨달은 날이었다.



교수님과 21살에 강의 시간에 늦어 상담하던 날을 이야기 했다.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한다고 말씀 드렸다. 그때 교수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고 상황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나에게 그러셨다. “그래~! 내가 그때 너한테 너의 인생을 살라고 말했잖아.” 나도 기억 못하는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주셨고, 내가 회사 취업하고 고군분투 하던 시절 카피를 어떻게 만들겠다고 이야기했던 부분도 들려주셨다.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 기억해준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담긴 것 같다.



6년의 시간, 은사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제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에 도착한 것. 강의실에 앉아있던 40대의 교수님과 20대의 내가, 50대의 교수님과 30대의 나로 다시 만났다. 처음 내가 교수님의 방에 도착하여 꽃다발을 건넬 때 교수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은 “oo아 너 정말 잘 컸다. 아가씨가 다 되었네.”였다. 그 말은 내가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온기로 남을 것이다. 교수님이 나에게 은인이 되어주신 것처럼 나도 후배들에게 작은 촛불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오래 다녔던 학교였는데, 6년만에 방문하니 가는 길이 너무 익숙한데 낯설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9시부터 6시까지 풀강에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서 김밥 물고 실기를 하던 짠하고 귀여운(?) 20대 초반을 여기서 보냈다.
모교 전경. 찐한 애증이 담겨있는 학교다. 애증이라 쓰고 애정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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