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 그리고 로망
학기가 시작되고 모든 것은 '인터넷' 상에서 '디지털'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수업(Lecture)은 당연히 Zoom으로 진행되었고, 세미나도 Zoom을 통해 이루어졌다. 수업 자료는 모두 인터넷 Moodle 사이트에 도서관 사이트와 연계되어, 읽어야 할 논문 리스트가 올라오고 PDF로 내려받았다. 간단한 퀴즈나 에세이 제출도 모두 인터넷 상으로 진행했다.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사실 상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 해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런 연유로 학교에 갈 일이 정말 없는데, 다행스럽게도(?) 통계 수업은 세미나를 학교에 가서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온라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 1시간 정도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첫 세미나 수업에 들어갔다.
통계 세미나 강의실에 갔던 첫날은 예상했어야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수업 풍경이 펼쳐졌다. 나도 물론 노트북을 들고 가기는 하였지만, 일단, 나만 S전자 노트북이고 나머지 학생들 거의 대부분은 아이패드 혹은 맥북이었다. 물론 그 통계 수업반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였겠지. 그리고 나머지들은 이제 막 학사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시작한 20대 초중반의 청춘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이패드 위에 애플펜슬을 이용하여, 슥슥 필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교가 하는 말을 세미나 강의자료(PPT) 화면에 텍스트(Text) 입력창을 열어서 적고 있는데 말이다. 하, 세월이 이렇게 변했구나.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되고 전자책이 널리 읽히는 시대에 공부하러 왔으면서 이걸 생각하지 못했다. 교실 풍경도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었을 거라는 것을.
순간 마음속에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왜냐면, 나는 기숙사에 프린터가 없어서 다음 주에 읽어야 할 논문을 인쇄할 요량으로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려고 했었다. 노트북 화면으로는 오랜 시간 논문을 읽기도 힘들고 PDF라서 형광펜 기능을 써도 중요한 내용을 기억하는 게 영 시원찮았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그래도 나름 밀레니엄 세대였는데)에는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에 밑줄도 좀 치고, 노트에 선형대수학 공식 써가며 공부해야 오늘 공부 좀 했구나 싶은 그런 때였다. 내가 런던으로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나의 20년 지기 친구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무려 8색 STABILO 형광펜 세트와 색색깔 SARASA펜 10자루를 선물해주었다. 다른 친구로부터 볼펜 한 자루는 목에 걸고 다니며 편하게 메모하라며 볼펜과 목걸이 볼펜집을 받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 동료는 내게 필기 열심히 하라며 라이언 공책 2권을 선물해줬다. 우리는 그런 '형광펜 세대'다.
형광펜 세대인 나는 색색깔 펜으로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필기감을 좋아한다. 글씨가 너무 잘 써지는 어느 날을 기억하고 싶어 하고, 아무리 전자책으로 공부할 수 있다 해도 결국에는 종이로 된 교과서를 사고야 마는, 교과서의 여백에 교수님 말씀을 메모하며 형광펜으로 말풍선 만들어 넣고, 중요한 부분은 3M 인덱스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공부한다. 내게 글을 읽는 것은 단순히 글자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책장을 넘기며 책 속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ctrl+F로 검색해서 어디에 나왔던 용어였는지 찾는 PDF로만 읽을 때에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공감각적 이해력과 기억력을 사용한다.
그런 아날로그 형광펜 세대인 내가 2020년에 다시 학생이 되어 아이패드 세대를 만나, 형광펜과 색색깔 볼펜이 아니라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을 사 왔어야 했다고 약간의 후회를 해본다. 그러나 정말 잠시 잠깐의 후회일 뿐이다. 아이패드를 살까 고민하다가도, 1년 후 한국에 돌아가면 결국 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쉬이 단념할 수 있었다. 거금을 들여서 살만큼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조금 불편해도 괜찮았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어떤 분야에서는 변화의 속도를 부지런히 쫓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방식을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책은 종이책 넘기는 맛으로 읽어야 하고, 영화는 스크린에서 봐야 제 맛이고, 연말연시에 각별히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손편지와 손카드를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적응이 힘들어서 적응하지 않는 것을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포장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는 핑계라고.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 애플펜슬도 '아날로그'가 될 것이다.(사전적 의미의 아날로그는 아니다. 애플펜슬의 기술은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디지털이니까.) 그리고 지금의 아이패드 세대도 그때가 되면 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구식 패드 위에 글을 쓰며,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고. 나는 이 아날로그 감성을 누릴 것이라며. 그렇게 세대는 변하고, 어린 날의 경험은 감성으로 남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로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