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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밤 과자점 Jun 13. 2021

우리 같이 살까?

아는 사이에서 '인연'이 되는 임계점

2020년 10월 7일부터 2021년 1월 28일까지. 113일이다. Old street의 Canto Court 기숙사에서 지내온 밤을 헤아려보니. 약 4개월의 시간을 함께한 나의 기숙사를 떠나기 전날 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정든 곳을 떠나는 날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며 숙소의 곳곳을 아련하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런 낭만은 없었다. 오직 이삿짐과의 사투뿐이었고, 침대 위에 담요 깔고 쪽잠을 청해야 했다. 여행용 캐리어 2개 들고 도착했던 나의 유학생 짐보따리는 4개월의 시간 동안 많이도 늘었다. 결국 종이박스며, 장바구니며 구석구석 쑤셔 넣었는데도 택시를 불러 트렁크 한가득을 채우고야 말았다. 그렇게 보따리장수 같은 행색으로 기숙사를 떠나 Hampstead로 이사를 했다.

10월 7일의 기숙사, 1월 28일의 기숙사, 그리고 1월 28일의 Hampstead


 4개월 가까이 지낸 나의 기숙사 17제곱미터 단칸방에 비하면 이제 방 2개, 화장실 2개, 주방 겸 거실이 있는, Flat 10은 궁궐로 이사를 한 기분이다. 남은 런던 생활을 함께 할 나의 Flatmate 혜림이와 이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이사를 오기까지(런던에서 집 구하기 II) 약 1달 넘는 시간 동안 이 날을 너무너무 고대하였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동기와 대학생 때도 안 해 본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문득,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것도 다 운명이고 인연이다.


 혜림이랑 다시 연락하게 된 것은 2017년쯤이었으려나. 업무로 연락하게 된 걸 계기로 1년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보게 되었고, 그러다 19년쯤 내가 영국 유학 계획을 이야기하고 (그때는 코로나 시국이 올 줄 몰랐다.) 런던에서 자주 보자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고, 런던에 둥지를 틀었던 혜림이는 결국 한국에 들어와 지냈었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내가 런던으로 최종 학교를 정하면서 집을 알아보고, 혜림이는 다시 런던에 간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또 록다운이 올 테고 어딘가를 많이 다니지도 못 할 텐데 스튜디오에서 답답하게 사느니 런던 3 존쯤에서 돌아다닐 공간이라도 넓은 집을 얻어야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흠.. 네가 그런 집 구하면 같이 살까 ㅋㅋㅋㅋㅋ 방 두 개짜리로”

“그래 고민해봐 혜림”

“진심이야 근데?”

“응. 진심인데. 같이 살면 좋지 뭐 ㅋㅋㅋ 식물도 좀 키우고ㅋㅋㅋ”

“너랑 같이 사는 거면 락다운 돼도 견딜만할 거 같은데”

“글치 혼자 있는 거보다 훨~”

“흠.. 그럼 나 진짜 고민해본다?”

“응!”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과정이 누군가 코로나가 터질 줄 알고 미리 그려 놓은 계획대로 진행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무 살에 만난 우리가, 스무 해를 지나, 스무 살 때는 생각한 적도 없는 일을 하며 서로 각자의 길을 걷다가, 여기 런던에서 다시 만나 같이 살게 되다니. 이런 건 우연인가? 인연인가?


 인생은 그렇게 우연인 듯, 인연인 듯한 연의 연속이기도 하다.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에서 그랬던가. ‘이 지구 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실을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실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만나는 것이 인연이라고.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인연은 사실 그저 확률이라거나, 하늘의 뜻은 아니다. 각자가 쌓아온 시간이 함께 공유한 시간을 만나 임계점을 넘을 때에 인연이 된다. 그리고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안에는 각자의 용기가 만든 발화의 순간이 있다. 내가 업무 상 혜림이에게 연락을 한 것도, 그리고 혜림이가 내게 장난처럼 같이 살까라고 말한 것도 모두 작지만 큰 용기였다. 나는 그래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크기로든 용기 내어 걸어와 주었기에 그리고 내게 그들의 곁을 준 것에 고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니 2021년에 가장 고마운 사람은 혜림이다.


 같이 살까?로 시작하여 오늘도 열심히 함께 밥 먹고 살아가는 식구가 되어준 혜림이와의 동거는 그렇게 2021년 1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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