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여 영국은 2차 록다운이 시작되었고 덕분에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기념 베를린 여행도 취소되었다. 쓸쓸한 연말이 될 것 같았다. 코로나 시대의 유학, 코로나 시대의 런던은 이렇게 우울 뻑적지근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퍽 서글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매주 월요일 오후에 대학 동기들을 줌으로 만나 우리말로 수다 떠는 시간이 내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끼리 만나서 노는 Zoom 놀이터', 일본, 한국, 영국에 있는 4명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가상현실 속의 시간. 가끔 객원 참가자로 미국에 있는 친구도, 생일 파티를 위해 한국과 영국에 있는 또 다른 친구들도 참여했지만 정예 멤버는 4명이었다. 그저 각자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살이 찌는데 운동하기 싫다는 이야기, 굳이 곱씹어 기억할 필요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깔깔 거리며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작이 누구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친구가 해리포터 시리즈 블루레이를 구매한 이야기쯤이었던 것 같다. 무심코 뱉은, 그럼 해리포터 시리즈 정주행 한번 해볼까? 에서 시작되어 J는 그 옛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에 나오던 장면을 떠올리며, 해리와 샐리가 각자 자기 집 방 침대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전화로 수다 떨던 그 장면처럼 우리도 해보자!라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계획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매일 1편씩 보면 31일까지 8편 다 볼 수 있어’라는 말로 불을 지폈다. 갑자기 다들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해리포터를 보는 방법을 찾았다. 일본에 있는 K는 애플 TV로, 한국에 있는 J는 왓챠로, 영국에 있는 나는 구글 play로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이 시작점인 C는 블루레이를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줌으로 만나 카운트 다운을 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약간의 시차로 누군가 먼저 놀래서 덕분에 안 놀래기도 하고, 대사가 도돌이표 노래처럼 반복되기도 했지만,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술과 안주를 놓고 수다를 떨면서 함께 해리포터를 완주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런 형태의 놀이 문화를 ‘Watch party’라고 부르고 이미 관련 앱들이 출시되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좀 내 본 기숙사 벽, TV로 연결한 해리포터 영화, 우리만의 Zoom 놀이터
혼자 시작했다면 다 끝내지 못했을 해리포터 시리즈 총 8편. 혼자 봤으면 다 이해하지 못했을 이야기들. 각자가 알고 있는 내용을 첨언하고 설명하면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포터 가문과 블랙 가문, 위즐리 가문의 적폐 이야기까지 신나게 떠들면서 우리는 그렇게 이 시대의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Zoom 놀이터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냈다. 영화를 보면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도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먹고, 크리스마스 크래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으며, 민스파이와 크리스마스 푸딩이 올라오는 걸 보며 영국의 크리스마스를 느껴야 하는 서글픔과 함께. 더불어 마법 학교에서도 교수님들이 티타임을 갖는구나 느끼고, 킹스 크로스 역이라고 하지만 세인트 판크라스 역사의 모습임을 알아보고, 밀레니엄 다리가 휘어지는 장면에서 보이는 테이트 모던과 세인트 폴 대성당을 한눈에 인지하는 나는, 그렇게 코로나로 인해 영국에 있으면서 런던을, 영국을 모니터로 만나고 있었다.
마흔 살의 유치함과 긍정 마인드
사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방구석에서 보낸 보잘것없는 크리스마스 연휴, 연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사한 요리도 없었고, 멋진 공연이 함께한 것도 아닌, 그러나 이 특별할 것 없는 이벤트도 내게는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나중에 그 시간을 한량 놀음이었다며 회상할 테지만,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매우 뿌듯하고 뜻깊은 시간으로 기억되겠지. 그리고 고마움과 감사함을 되새길 것이다.
우선, 나이 마흔을 먹어서도 판타지 영화 정주행에 진심일 수 있는, 만나면 언제나 20년 전 대학시절처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각자의 생업이 있지만 일주일에 하루쯤 3-4시간씩 함께 보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고맙다. 어쩌면 이 친구들과는 나이가 오십, 육십을 넘어 팔십이 되어도 이렇게 놀 것 같다. 유치하게. 어릴 때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친구들을 보며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유치함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한량 놀음이 화상 원격회의 기술에 기반한 코로나의 산물이고, 런던 유학생활의 거의 모든 시간을 차지했던 가상 환경이었는데, 결국 다시 그 기술의 도움으로 코로나로 인한 행동의 제약과 관계의 제약을 일정 부분 해갈시켜줬다는 것은 웃픈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일상에 행복해하는 정신을 가진 나,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지고, 한 번뿐인 오늘이므로 기왕이면 즐겁게 긍정적으로 살아가기로 한 나를 칭찬한다.
무엇보다, 코로나 시대에 이런 시간의 자유가 허락되어 한량 놀음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한량 놀음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진실로 감사할 일이다. 과연 내가 앞으로 이런 여유를 언제 또 누릴 수 있을까? 마흔 살에 허락된 이 여유가 나중에 후회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제 막 시작되는 나의 중년의 삶을 응원한다. 때론 아이처럼 유치해도 좋다. 때론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이어도 좋다. 때때로 삶의 여유를 누릴 줄 아는 나의 40대, 우리 모두의 40대를 응원해본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덧. 우리의 Zoom 놀이터는 겨울과 봄을 지나 2021년의 여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해리포터를 완주한 그날, 해리포터의 스핀 오프, 신동사(신비한 동물 사전) 워치 플레이를 약속했다. 여전히 진심을 다해 유치하게 노는 마흔 살의 Zoom 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