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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밤 과자점 Sep 01. 2021

안달복달 V vs 세상 느긋한 C

사람 다 거기서 거기지

 전 세계에서 학생이 모여드는 LSE에서 만난 이들은 사실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게다가 나는 선택 과목으로 내가 속한 학과 수업이 아닌 다른 학과 수업까지 들었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정말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을 텐데 아쉽게도 모든 학기를 온라인으로 수업한 탓에 런던에 온 학생이 절반이 안되고, 런던에 왔다 한들 만날 수가 없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 없는 무채색의 인간관계 중에 그래도 유달리 기억에 남는 둘이 있다. 둘을 같은 수업에서 만났는데 정말 너무 양극단에 있는 친구들이라 비교가 되기도 하고 그들이 인지할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내게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겨준 Vaughn(이하 V)과 Clay(이하 C)에 대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V는 브라질 청년이었는데, 첫 학기에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세미나 그룹이어서 여러 차례 만났다. 그런데 항상 줌 화면을 끄고 수업을 듣고 소그룹 모임을 해도 절대 화면을 켜지 않았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만 소리를 켰고, 상대방이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브라질에 있다고 해서 시차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런던에 오고 나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뭐 줌 환경이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다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래도 좀 괘씸했다. 왜냐면, 수업만 끝나면 그룹 과제 업무 배분은 어떻게 할 건지 누가 할 건지를 정하자고 바로 메일로 독촉하는 통에 교수님보다 더 스트레스를 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하면 세미나 수업할 때 말을 좀 할 것이지.


 그러다가 어느 날 조별 과제를 제출해야 할 기한이 다가왔는데, 정리해서 올리기로 한 다른 친구가 연락이 안 된다면서 V가 왓츠앱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다려보자고 했는데 V는 자기 이제 비행기 타야 한다며, 과제 게시하는 걸 확인할 수 없으니 본인이 제출하겠단다. 응? 아니 아직 몇 시간 남았고 좀 늦게 올린다고 크게 탈 나는 것도 아닌데? 이 친구 정말 안달복달하는 성격이구나 싶었다. 내가 조금 더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 해도 막무가내. 결국 V는 자기가 대충 써서 올려놓고 비행기를 탔고 원래 하기로 했던 친구는 기한에 맞춰서 또 제출을 했다. 결국 우리 그룹은 이상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 V는 비행기를 타버려서 제출한 게시물을 삭제할 수도 없었다. V의 조바심으로 원래 하려던 친구는 좀 기분이 나쁜 내색이었고,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C는 미국 청년이었다. V와 정반대로 수업 시간에 항상 화면을 켰고, 적극적으로 질문도 하고 소그룹 회의에서도 활발히 의견을 내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적절한 리액션을 했다. 덕분에 C와 같은 그룹이 되면 세미나 시간이 매우 생산적이고 역동적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조별 과제를 해야 할 때면,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걸 다 선택하고 나면 본인이 남는 역할을 하고,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주는 누가 봐도 모범적인 학생, 그 자체였다.


 나와는 세미나 시간에 임의로 맺어주는 소그룹 방에서 여러 차례 만난 덕분에 몇 주 지나서는 소그룹 회의 시간에 서로 안부도 묻고 과제 관련 푸념도 하고 꽤 친밀감이 생겼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대한 뉴스도 보고 있다며 궁금했던 것들을 내게 물어 오기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공무원 생활도 한 나의 커리어와 경험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린 C였지만, 나보다 더 의젓했고 여유가 넘쳤다. 내가 과제와 논문 때문에 한창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소그룹 시간에 했는데 바로 다음날 왓츠앱으로 어제 내가 너무 스트레스받고 피곤해 보여서 걱정된다며, 다 잘 될 거라고 위로의 말까지 전해주었다. 이런 스위트한 구석까지.  


 그랬던 V, C와 2학기에도 같은 수업을 하나 들었는데, 해당 수업은 학점에 들어가는 그룹 과제의 조편성을 학생들끼리 알아서 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당연 V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고, C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C는 역시나 매우 흔쾌히 같이 하자고 했고, 자기가 몇 명 더 모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C를 포함하여 그룹 편성 최대 인원을 채웠다. 그런데 2학기 들어와서는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세미나 시간에 같은 그룹으로 묶인 적이 없어서 말 한 번 안 하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안부도 묻지 않던 V가 학교 메신저로 자기랑 같이 과제를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하- 요 녀석 봐라? 싶었다. 자기 급할 때만 연락하고, 또 과제할 때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안달복달 괴롭힐 거면서! 흥칫뿡이닷! 나는 다른 그룹에 이미 들어가서 같이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답을 했다. 그런데 마치, 매우 오랜만에 연락해서는 본인 결혼한다고 말하고, 모바일 청첩장 전해주며 꼭 와 달라고 하더니 막상 결혼식 이후에는 일절 연락 없는 친구 마냥, V는 나의 답변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 세상 어디에 가도 이런 인간은 꼭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국적, 인종, 나이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 V와 C를 겪었지만, 둘 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어디를 가나 꼭 있는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북미권은 어떻고, 남미 사람은 어떻고 유럽 사람들은 어떻고 식의 외국인을 만났을 때 작동하는 선입견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느꼈다. 보이는 외양과 그의 국적, 인종은 사실 그 사람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의 나이도 그를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나라 사람이 더 착하고, 어느 나라 사람은 더 악하고는 없다. 80년대생은 어떻고 90년대생은 어떻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저 각자가 각자의 성격을 타고 난다.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어느 인종이거나,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고 안달복달하는 사람 느긋한 사람이 있고 내가 먼저인 사람 남이 먼저인 사람이 있다. 인류의 보편적 성격 유형은 세상 어디에나, 어느 시기에나 나타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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