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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Aug 21. 2021

먹을 줄 모르네

영국의 식재료

흔히 맛없는 음식의 대명사로 영국 음식을 꼽는다. "영국엔 진짜 먹을 게 없더라" 식의 말이 나오면 영국을 끔찍이 사랑하는 나는 괜히 편 들고 싶어져 "아냐 런던에 맛있는 거 완전 많아..."하고 반박한다. 줄임말 뒤에 숨은 말은 '영국 음식이 아니어서 그렇지'다.


1-2주씩 출장이나 여행을 오면 주로 외식을 하니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2021년 들어 정말 살림다운 살림을 하게 되자 영국의 식재료가 몹시 아쉽다. 물론 오히려 한국에 없거나 비싼데 영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도 많겠지만 내가 모르는 식재료를 쓸 일이 잘 없다보니 없는 게 더 많다고 느낀다.



서양에서 빵을 구하기가 한국보다 어렵다고? 밀가루가 주식인 나라에서?


감히 그렇다고 말하겠다. 한국처럼 다양한 재료를 써서 빵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생산, 판매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은 빵 종류가 다양하다. 기본적인 식빵만 해도 우유식빵, 옥수수식빵에서부터 밤이나 견과류가 들어간 식빵, 떡이나 팥 등 부재료가 돋보이는 식빵 등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스콘의 종주국인 영국보다 스콘이 맛있고 다양하다. 영국 스콘은 플레인, 건포도, 초콜렛 정도고 대부분 클로티드크림이나 잼을 발라 먹는다. 이렇게 수백년을 먹었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잼과 크림 중 뭘 먼저 발라야 하는지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기나 하지(우리의 탕수육 부먹 찍먹 느낌). 반면 한국은 스콘 열풍이 불고 있다. 전부터 유행한 팥과 버터를 샌드한 앙버터 스콘은 이젠 기본 메뉴일 정도로 쑥스콘, 흑임자스콘, 초당옥수수스콘 등 영국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기발한 스콘이 전국 베이커리에 깔렸다. 


1. 크림티(스콘과 홍차 세트)로 유명한 런던의 Tea and Turtle 카페   2. 영국식(?) 스콘으로 인기 있는 서울의 레이어드 카페


아침식사를 빵으로 먹는 나에게 맛있는 빵은 생필품이다. 한국에서는 밀도의 담백식빵과 아티장 베이커스의 클래식 사워도우, 베즐리의 칠곡식빵을 냉동실에 항상 구비해놓고 가끔 별미로 스콘이나 팥빵 소보로빵 등을 먹었는데 영국 베이커리에선 죄다 사워도우, 바게트, 시나몬번, 스콘으로 통일해서 판다. 물론 사워도우는 말도 안 되게 싸다. 하지만 참 영국 사람들은 새로운 맛에 관심이 없구나 싶다. 맘모스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 쫄깃담백한 밀도 식빵 좀 누가 배워오면 안 될까?  



과일

다음 불만 카테고리는 단연 과일이다. 한국처럼 품종이 개발되지 않는다. 한라봉이 처음 등장했을 때 신기했는데 이젠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등 더욱 선택지가 넓어지고 맛있어졌다. 영국에도 물론 여러 품종이 있고 mandarin, tangerine, satsuma 등이 귤과 비슷하다. 문제는 껍질이 까기 어렵고 당도도 떨어진다는 것. 


그나마 귤은 잘 고르면 괜찮다. 맛에서 정말 크게 차이 나는 건 딸기다. 한국 딸기는 아시아에서도 유명하다. 싱가폴 친구 몇몇은 봄에 꼭 한국에 와서 매일 딸기 한 팩을 먹어 치우고 간다. 여기 딸기는 생김새만 딸기요 식감도 당도도 노노다. 배는 또 어떤가. 한국 배처럼 시원 달달한 배를 상상하면 크게 실망한다. 서양배는 떫고 건조하다. 어렸을 때 먹고 이미 마음을 굳게 닫아 성인이 되어 다시 시도해보지도 않았다. 


 

채소

다음은 채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래 고구마. 한국의 달콤하면서도 밤 같은 식감의 고구마는 없다. 물기가 많고 달지 않으면서 어찌나 큰지, 토막내지 않고 찌려면 한 시간을 쪄도 익지 않을 것 같은 비주얼이다. 그래서 그렇게 요거트 드레싱을 끼얹어 먹거나 튀겨서 fried sweet potato로 먹나보다. 오이는 뚱뚱해 가운데 물컹거리는 씨가 너무 많다. 가지는 껍질이 질겨 벗겨먹어야 할 수준이다.


가장 아쉬운 건 깻잎이다. 깻잎을 먹지 않아 아시아 식료품점을 가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데 한인 마트에서 스무 장에 4파운드(6,500원) 정도 한다. 올해 들어 딱 한 번 사먹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한국에선 막 두 장씩 싸먹는데. 신기한 건 한국에선 고깃집에서 리필하려면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명이나물이 영국엔 그냥 자생으로 자란다는 것.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이미 철이 지나 직접 채집해보진 못했지만 내년 봄이면 주변 숲에서 '심봤다!'를 외쳐볼 수 있길 기대한다.



생선

생선은 아무래도 나라마다 달라 한국에서 흔하게 먹던 생선이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내 최애 생선은 갈치와 고등어. 여긴 갈치가 없다. 먹는 데 있어 모험 정신이 없는 걸로 알려진 영국인들은 주로 연어, 대구(cod와 haddock), 참치를 먹는다. 중국집에서 짬뽕 한 그릇 시키면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오는 오징어가 여기에선 잘 유통되지 않는지 김치전에 넣어먹으려고 생선가게에 몇 번이나 들렀는데 못 사고 그냥 새우 넣고 부쳐 먹었고 아직도 오징어 짬뽕은 못 끓여먹었다. 오징어, 네가 뭔데 이렇게 비싸게 구는데? 먹고 말테다!



과자와 아이스크림

영국의 과자는 (조금 과장을 보태면) 딱 두 가지다. 감자칩과 쇼트브레드. 감자칩도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맛이 아니라 보통 Salted(소금), Salt & Vinegar(소금과 식초), Cheese & Onion(치즈와 양파). 결국 그냥 다 짜다. 편의점만 가도 재밌는 모양과 식감의 과자를 다양한 맛으로 즐길 수 있는 한국과 차원이 다르다. 더블린에서 일할 때 팀원들에게 꼬북칩을 한 상자 보내준 적도 있다. 


3. 영국의 감자칩 대명사 워커스 - 생각보단 다양한 맛이 있네   4. 허니버터 아몬드로 유명한 길림양행 - 맛이 30가지에 달한다


견과류도 salted 또는 honey-roasted 두 가지. 허니버터아몬드로 히트 친 길림양행의 아몬드는 허니버터, 와사비, 군옥수수, 마늘빵, 카라멜솔티드, 김, 청양마요, 불닭, 망고바나나, 쿠키앤크림, 흑당밀크티, 당근케이크, 민트초코, 제주말차, 떡볶이, 요구르트, 체리, 딸기, 복숭아, 티라미수, 인절미, 흑임자, 단팥, 꿀홍삼, 꿀유자, 헤이즐넛봉봉 등 말 그대로 수십가지 맛으로 나오며 계속해서 새로운 맛을 선보인다. 앞서 스콘에서도 느꼈듯, 영국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맛을 계속 먹는 데 싫증을 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도 새로운 맛을 원하고 도전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아이스크림은 또 어떤가. 난 젤라또를 좋아하는 자칭 고급 입맛이다. 편의점 아이스크림 중에는 하겐다즈만 먹는다고 재수없게 말한다. 이젠 비비빅이나 메로나 아님 붕어싸만코 하나만 먹음 소원이 없겠다. 여긴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렛을 입힌 기본 아이스크림바만 있다(역시 과장을 섞어).  



영국의 잇템

아주 욕을 한 바가지 했으니 좋은 얘기도 좀 덧붙여야겠다. 영국에 있기 때문에 손쉽게 또는 값싸게 누리는 식재료. 일단 고기가 싸다. 삼겹살 500g에 3.5파운드(5,500원). 버터도 마찬가지. 한국에서는 9,000원 하는 이즈니 버터가 250g에 2.5파운드(4,000원). 아보카도도 1파운드 정도면 살 수 있다. 베이킹족이라면 만세를 외칠 각종 베이킹 재료도 있다. 치즈와 와인도 훨씬 싸다. 한국에는 없는 와인도 구할 수 있다. 대신 소주는 심하게 비싸다(또르르). 우유를 좋아하는 유진이에 따르면 여기 우유가 훨씬 진하고 맛있다고 한다(한국보다 맛있는 거 겨우 찾았네). 


5. 암브로시아 커스터드 크림 - 따뜻하게 데워 스콘에 끼얹어 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   6. 하인즈 베이크드 빈즈 - 토스트, 계란 후라이, 소시지와 꿀조합


사실 맛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는 내가 떨어지면 사놓는 영국 식품이 있다. 바로 베이크드 빈즈와 커스터드 크림이다. 캔 하나에 75펜스, 65펜스 한다. 영국 식자재가 성에 안 찬다고 실컷 적어놓고 정작 내가 좋아하는 영국 식품은 영국 사람들도 싸구려 취급하는 통조림이라니.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추억의 음식이다. 어렸을 때 영국에서 학교 급식으로 먹은 음식이라 영국을 떠나 있는 내내 그리웠던 맛이다. 외식을 하면 시제품이 아닌 식당에서 직접 제조한 베이크드 빈즈나 커스터드 크림이 나올 때가 있는데 물론 더 고급이지만 난 하인즈(Heinz) 베이크드빈즈와 암브로시아(Ambrosia) 커스터드 크림의 저렴한 맛이 좋다. 걱정 없고 마냥 즐거웠던 그 시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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