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4계절
영국은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변화무쌍함이 이를 데 없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차례 비가 쏟아진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해가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햇살이 비출 때와 구름에 가렸을 때 체감온도가 극명히 달라 당황스럽다. 날씨에 기분이 좌우되고 계획이 어긋날 때 남다르게 괴로워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최악의 조건이다.
바로 지난 주만 해도 날씨에 심히 휘둘렸다. 월화수에 회의가 많아 휴가를 내기엔 목금이 수월해 진작부터 목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 당일치기로 놀러가기로 했다. 기차표는 많으니 늦게 예매하면 좀 비싸긴 하지만 최대한 기다렸다 목금 이틀 중 날씨가 좋은 날, 카디프와 리버풀 중 날씨가 좋은 곳으로 가기로 합의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회를 준 거지. 이틀 중, 한 군데는 날이 괜찮겠지.
주말에 날씨를 봤을 때는 두 곳 다 금요일(9월 3일)이 더 일기예보가 좋아 금요일로 정하고 기차는 수요일 저녁, 날씨가 좀더 확정적일 때 끊기로 했다. 그 당시로선 카디프가 유력했다. 화요일이 되자 금요일 오전에 카디프가 흐리고 비 예보가 있는 일기예보 사이트도 보여 결국 리버풀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결국 우리는 리버풀에서 햇살 한 가닥도 구경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나를 애타게 한 일정은 같은 주 일요일(9월 5일) 피크닉 약속이었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에어비앤비 직원이자 내 팀이었던 크리즈와 토마와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기로 몇 달 전에 약속했었다. 둘이 프랑스와 룩셈부르크를 한 달 가까이 갔다가 돌아와 자가격리 하느라 날을 못 잡다가 8월 들어 날씨 좋은 주말을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해 어느새 9월이 되었다. 이젠 내가 곧 출국을 앞둬 "비만 오지 않으면 하자"며 일요일로 날을 잡은 거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해가 보이던 일기예보에 갑자기 비 그림이 생기면서 이놈의 나라는 정말 피크닉 한 번 못하게 하냐고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며칠 전 예보에서 비가 사라졌고 피크닉 당일, 한낮 기온이 25도까지 올라가며 뜻밖의 여름 날씨를 선사했다. 한국에 오면 매일 김밥 한 줄을 먹는 크리즈가 유진이와 내가 싼 김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아침부터 시금치를 데치고 당근을 볶고 달걀 지단을 부치며 정성스레 싼 김밥 도시락을 들고 프림로즈힐(Primrose Hill)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쓰잘데 하나 없는 수다를 떤 후 이런 날씨 다시는 없을 거라며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크리즈와 토마는 자전거를 타고, 유진이와 나는 볼트(Bolt)를 불러 타고.
나쁜 남자 같은 영국 날씨. 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극도의 짜증과 뜻밖의 기쁨을 준다. 한순간에 돌변하는 변덕꾸러기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모레 이틀 간 28도까지 오르는 말도 안 되는 날씨가 예상된다. 꼼짝없이 줄줄이 비엔나 회의로 방구석에 쳐박혀 있을 화요일 수요일에. 하.. 난 왜 하필 이런 날씨의 영국을 좋아하는 걸까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