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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토끼 Sep 06. 2021

나쁜 남자 같은 영국 날씨

1일 4계절

영국은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변화무쌍함이 이를 데 없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차례 비가 쏟아진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해가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햇살이 비출 때와 구름에 가렸을 때 체감온도가 극명히 달라 당황스럽다. 날씨에 기분이 좌우되고 계획이 어긋날 때 남다르게 괴로워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최악의 조건이다. 


바로 지난 주만 해도 날씨에 심히 휘둘렸다. 월화수에 회의가 많아 휴가를 내기엔 목금이 수월해 진작부터 목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 당일치기로 놀러가기로 했다. 기차표는 많으니 늦게 예매하면 좀 비싸긴 하지만 최대한 기다렸다 목금 이틀 중 날씨가 좋은 날, 카디프와 리버풀 중 날씨가 좋은 곳으로 가기로 합의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회를 준 거지. 이틀 중, 한 군데는 날이 괜찮겠지. 


주말에 날씨를 봤을 때는 두 곳 다 금요일(9월 3일)이 더 일기예보가 좋아 금요일로 정하고 기차는 수요일 저녁, 날씨가 좀더 확정적일 때 끊기로 했다. 그 당시로선 카디프가 유력했다. 화요일이 되자 금요일 오전에 카디프가 흐리고 비 예보가 있는 일기예보 사이트도 보여 결국 리버풀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결국 우리는 리버풀에서 햇살 한 가닥도 구경하지 못했다.


구름 잔뜩 낀 리버풀 - 1. Museum of Liverpool   2. Pump House   3. Tate Liverpool


이보다 더 나를 애타게 한 일정은 같은 주 일요일(9월 5일) 피크닉 약속이었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에어비앤비 직원이자 내 팀이었던 크리즈와 토마와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기로 몇 달 전에 약속했었다. 둘이 프랑스와 룩셈부르크를 한 달 가까이 갔다가 돌아와 자가격리 하느라 날을 못 잡다가 8월 들어 날씨 좋은 주말을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해 어느새 9월이 되었다. 이젠 내가 곧 출국을 앞둬 "비만 오지 않으면 하자"며 일요일로 날을 잡은 거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해가 보이던 일기예보에 갑자기 비 그림이 생기면서 이놈의 나라는 정말 피크닉 한 번 못하게 하냐고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며칠 전 예보에서 비가 사라졌고 피크닉 당일, 한낮 기온이 25도까지 올라가며 뜻밖의 여름 날씨를 선사했다. 한국에 오면 매일 김밥 한 줄을 먹는 크리즈가 유진이와 내가 싼 김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아침부터 시금치를 데치고 당근을 볶고 달걀 지단을 부치며 정성스레 싼 김밥 도시락을 들고 프림로즈힐(Primrose Hill)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쓰잘데 하나 없는 수다를 떤 후 이런 날씨 다시는 없을 거라며 젤라또를 먹으러 갔다. 크리즈와 토마는 자전거를 타고, 유진이와 나는 볼트(Bolt)를 불러 타고.


결국 화창한 날씨로 나를 기쁘게 한 애증의 영국 -  4. 프림로즈힐에서 피크닉  5. 참치김밥 계란지단김밥   6. 젤라또로 마무리


나쁜 남자 같은 영국 날씨. 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극도의 짜증과 뜻밖의 기쁨을 준다. 한순간에 돌변하는 변덕꾸러기라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모레 이틀 간 28도까지 오르는 말도 안 되는 날씨가 예상된다. 꼼짝없이 줄줄이 비엔나 회의로 방구석에 쳐박혀 있을 화요일 수요일에. 하.. 난 왜 하필 이런 날씨의 영국을 좋아하는 걸까 스스로를 원망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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