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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외로움, 극단의 행복

그 중간계에 사는 지금

by 멘탈튼튼 김프리

그토록 외로웠던 20대를 보내면서 나는 누가 묻지 않아도, 처음 본 사람에게도 내 지난 일들의 억울함을, 괴로웠던 속내를 다 털어놓고, 나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알아달라 외쳤다.

알몸으로 광장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랄까.


<나 좀 봐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이렇게 힘든 제가 여기 있다니까요.>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내 마음을 힐끗거리기만 할 뿐, 무신경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나를 안보고 지나칠 때마다 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돈을 구걸하듯, 나는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구걸했다.


더 과감하고, 더 잔인하고, 더 요란하게 행동하는 방법 말고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는 법을 몰랐다. 다행히도 병적인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고, 혼자 위로하고 혼자 위로받는 방법을 잘 찾아갔다. 주로 술이었고 이따금씩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로 인해 수도 없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별 탈이 없었던 게 참 행운인 듯 하다.


이렇게 깊은 뿌리없이 휘청이는 마음은 남들이 그냥 하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뽑혀버렸다.


잘 지내니? 라는 질문에 느닷없이 펑펑 울고

밥 먹었니? 라는 질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가볍게 건내는 안부인사 조차도 나에겐 큰 의미으로 다가왔고, 고마워 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생각했다. 언제 다리 아래로 떨어질 지 모르는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의 벽은 단촐한 안부인사 한 마디로 허물어진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렇게 휩쓸리다 정신 차려보면 늘 제자리였고 나는 다시 외로워졌다. 어딜 가도 외로웠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웠다. 참 오랜기간 홀로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의 끝이 비극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홀로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아 좋다.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이 있고, 퇴근시간이면 변함없이 집에 오는 남편이 있어 감사하다.


셀 수도 없이 외로웠던 날들을 돌아보니 차라리 외로웠던 게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외롭고 고된 마음을 이해하는 넓은 아량도 생겼고, 이젠 최악의 상황이 와도 뿌리가 뽑힐 정도로 휘청이지 않는다.


과정은 고단했지만 결론은 해피엔딩이고, 나는 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인생 여정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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