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외로움의 끝, 결혼
마음 둘 곳 없어 펄럭이는 마음들, 이젠 안녕
부모님의, 아니 더 정확하겐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으로 대학을 왔다. 꿈을 잃고 이해받지 못한 내 마음들은 결국 학교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밖으로 뿌려졌다. 그 흔하디 흔한 대학친구 한 명이 없다. 아르바이트 하고 학교 공부하고, 쓰라린 마음 부여잡느라 엠티 한번, 미팅 한번을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도 참 외로웠지만 그 땐 친구 하나, 정말 딱 한 명의 친구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23살.
대학 휴학을 하고 직장에 다녔다.
당시 연락하고 가깝게 지냈던 4명의 친구들은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부모님의 지원으로 강남 한복판, 논현동과 신사동 원룸에 전세로 살았다.
5명 멤버 중 유일하게 나만 보증금 800에 월 45만원, 잠실 원룸에 살았다. 나 혼자 월세와 생활비를 다 감당하며 살았다. 이때부터 시작인 것 같다.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어도 끝도 없이 외로웠던 시작이.
그렇게 시간은 흘러 26살.
두번째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전사 통틀어 나만 비정규직이었다. 대학교를 중퇴한 나의 처우에 대해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었고, 나보다 어리지만 4년제 대졸자 동생들은 부모님 찬스, 학교 찬스를 써서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나만 외톨이라는 생각이 진하게 물들었다.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세상의 찬 바람을 혼자 다 얻어맞고 멍들고 찢어진 마음을 겨우 꿰메고 사는 일상.
아무도 없었다. 친구지만 그녀들은 깡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테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들의 부모님 찬스가 솔직히 재수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이번달 월급 없이는 서울살이를 할 수 없을만큼 돈에 쪼달리는 내 고단한 삶을 알아주는 직장 선배나 상사도 없었다.
그래서 27살, 산으로 갔다.
이해받고 싶었지만, 위로 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어서 산으로 갔다. 산에서 나무같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치유되었다.
그리고 30살, 결혼을 했다.
10년이 넘는 길고 깊은 우울과 외로움은 결혼 후 본색을 드러냈다. 강박, 화, 트라우마, 자격지심 같은 못난 모습들이 예고없이 튀어나왔고 그 때마다 나를 붙잡고 견뎌준 건 지금의 남편이었다.
그렇게 40살.
10년간의 울부짖음의 끝이 보인다. 이젠 나의 우울을 사람들에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너그러워졌다.
결혼으로 나의 외로움은 끝이 났다.
결혼이 무덤으로 가는 길인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결혼이 꽃 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