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상형과 결혼했습니다
대머리 NO, 술담배 NO, 공대를 나올 것
20대의 나는 꽤나 불안했다. 돈이 없었고 가족이 멀리 있었고 직장도 위태위태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엄마가 아빠랑 사는 모양을 보니 결혼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확실한 문이었다. 엄마는 이혼하겠다는 말을 딸인 나에게 수천만번 내밷었지만 여전히 법적으로 아빠의 아내다. 엄마는 요즘 아빠와 꽤 잘 지낸다.
이 문장을 쓰고나니 20년이 넘게 엄마의 고단함을 들어준 지난 시간이 갑자기 허탈해진다만 결론은 부부 사이에서 생긴 일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는 걸로.
연애도 별 관심이 없고 결혼은 더 관심이 없었던 나의 지난 날을 돌아보니 그간 나를 잠시 스쳐갔던 몇 안되는 남자들은 참 별볼 일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임자있는 놈이었다는 것.
멍청하게도 나는 몰랐었다. 알고 나서는 못 볼걸 봤다 셈치고 쿨하게 쌍욕을 날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나를 자책하며 괴롭혔다. 책에 쓰인 문장이 맞았다. 자존감이 낮은 여자의 연애는 날파리만 꼬인다고.
그래서 20대 중반에 딱 연애를 끊고 일만 하다 느닷없이 생각해봤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나의 남편이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서.
일단 첫번째 조건. 내가 돈이 없으니 돈많은 부자 남자는 부담스러웠다. 남편과 시댁의 지원을 받으면 주말에 시댁가서 커텐을 손빨래 해야된다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맹신했다. 두번째 조건은 아빠가 공무원 퇴직 후 딱히 할 일이 없는 걸 보고 자랐으니 내 남편은 기술이 있어야 했다. 마지막 세번째는 내가 술을 좋아하니 내 남편될 양반은 술을 못 마시거나 싫어하는 사람이어야했다. 술 마시고 끝이 좋은 관계를 본 적이 없다.
3가지 조건을 나혼자 마음 속에 품고 열심히 일만 하고 스트레스 푼다는 핑계로 술만 퍼마시다 어느날 문뜩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그 계단을 오르다 수십번 헛구역질을 했다. 호흡곤란으로...
살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온라인 등산 동호회를 가입했고 딱히 서울에 지인이 없는 나는 산과 연애를 하듯 등산에 몰입 했다.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심심했고 살고 싶어서...
그러다 정말 우연하게 남편이랑 연애를 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머리숱이 많고 공대를 나왔고 술담배를 할 줄 알지만 싫어한다. 사업상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입에 대는 수준..
난 이상형이랑 결혼에 골인했다. 아무 생각없이.
그리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 3가지가 맞는 사람이다보니 외모, 직장, 술담배로 싸울일이 없다.
공대 나온 남자는 기술이 있으니 큰 돈은 못 벌어도 눈만 조금 낮추면 일자리는 있고 의지만 있으면 창업도 할 수 있다. 머리숱은 유전이지만 살면서 외모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술담배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는 손으로 셀 수 없을만큼 많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이 리스크를 제거했다.
나는 머리숱이 많고 공대를 나오고 술담배를 싫어하는 남자와 10년째 잘 살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결혼이라는 제도에 치를 떨었던 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