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자발적 가장의 책임감을 덜어내다
새벽기상이 밀어낸 두번째 강박
저는 저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있어요. 연년생이다보니 어릴 적에는 엄청 많이 싸웠죠. 눈만 마주치면 싸웠어요. 어릴 적에 오빠는 또래보다 체격이 작아서 1년 아래 동생인 저와 비슷비슷한 키와 몸무게였어요. 그래서 제가 만만하게 본 모양입니다. 오빠한테 엄청 까불었죠.
어릴 적에 많이 치고 받은 남매가 커서는 사이가 좋다는 말 들어보셨죠? 저희 남매가 그랬어요. 가세가 기울면서 둘 다 일찍 사회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고 저는 서울에서, 오빠는 부모님이 계신 광주에서 생활하다보니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저에게 매일 전화해 서로 안부를 묻고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상의하고 의견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어요.
저의 서울살이도 녹록치 않았지만 오빠의 20대도 참 힘들었어요. 군대를 제대한 오빠의 첫 직장은 수입육 도매상이었는데요. 냉동상태로 수입된 고기를 창고에 저장하고 재고를 관리하는 일을 했었죠. 그 때 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때라 오빠가 하는 일이 얼마만큼 고된 일인 줄 말로만 들어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아침 6시경에 나가 하루종일 냉동창고에서 일한 후 저녁 7~8시 사이에 퇴근했어요. 그렇게 2~3년을 일하다 태권도장 창업을 위해 월급 50만원을 받으며 태권도장 지도사범을 했어요. 오빠의 20대는 캠퍼스에 대한 추억도 없었고 회사 생활의 즐거움인 월급과 보너스도 없었어요.
굳이 안정성을 따지면 오빠보다는 제가 조금 더 안정적이었죠. 그래서 저는 오빠가 자리잡을 때까지 우리집 가장은 나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은 월급이지만 매달 나오는 월급의 일정 부분을 떼서 부모님 생활비를 보내드렸고 필요하면 소액의 목돈도 융통해드렸어요.
서울살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동시에 착한 딸, 듬직한 딸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부모님을 부양해야 된다는 강한 책임감이 남편과의 잦은 툼의 원인이 되었다는거에요.
무슨 일만 생기면 저는 남편과 아이들보다 친정 부모님을 먼저 챙겼고 신혼초부터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부모님 생활비를 보내드려야 한다며 바득바득 우기기 시작했죠. 결혼을 했으면 제 가정을 지키고 가꿔야 하는데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 밖에 없었죠. 효도는 자녀된 도리이고 결혼도 했으니 시댁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적당한 선을 지켰어야 했는데 매번 선을 넘는 저 때문에 부부사이에 필요없는 오해들이 쌓이기 시작했죠.
왜 나는 돈을 벌고 싶은걸까? 왜 큰 성공을 원하는 걸까? 꽤 오랫동안 생각해봤어요. 남편의 벌이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굳이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겨놓고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무엇이 저를 돈돈돈 거리게 만들었을까를 새벽시간에 정말 진지하게 성찰해봤어요.
그리고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사회적 성취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의 부양 때문이었어요. 친오빠와 잘 상의해서 서로 가능한 선에서 부담없이 효도하면 되는건데 저도 힘에 부치면서도 집안을 떠 받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저를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께서 심근경색과 당뇨가 있으시고 잦은 부상과 사고로 고정적인 소득활동이 힘든 상황이니 제 마음이 많이 조급했었어요.
깨달음을 얻은 후 남편과 부모님께 선언을 합니다. 남편에게는 그동안 저를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제 회사를 그만두게 되니 매달 정기적인 용돈은 드리지 않기로 하자, 부모님께는 그동안은 직장이 있었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이젠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해야 하니 현실적으로 좀 어렵겠다고 이야기한 후 부모님 부양에 대한 짐을 내려 놓았어요.
물론 저는 여전히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어요. 그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제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에요. 앞으로도 저는 꾸준히 부모님의 건강하고 안락한 노후를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만 제가 덜어낸 책임감의 무게중심을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시부모님 쪽으로 옮겼어요. 한 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던 시소를 수평으로 맞추게 되었답니다. 자연스럽게 남편과의 다툼도 줄어들었고요.
그동안은 저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어요. 회사 일은 그다지 별로 바쁠 게 없었어요.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일도 아니고 마감이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매일이 바빴어요. 암담한 미래를 희망찬 미래로 바꾸기 위해 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어요.
그러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미라클 모닝을 시작하게 되었고 제가 풀어야 할 산더미 같은 문제들을 마당 위에 전부 다 꺼내보니 아무렇게나 꼬이고 엮여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르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실타래들을 마주하게 되었어요. 어수선한 실들 사이를 헤집고 뒤적일 수 있는 시간이 새벽시간이었고 결국 저는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시작점을 찾게 되었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핵심이 아니에요. 일찍 일어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거죠. 저는 저라는 인간을 찬찬히 뜯어보고 제 자리가 아닌 것들을 올바르게 재배치 할 수 있는 기회를 미라클 모닝을 통해 만들었어요. 버릴 것은 버리고 있어야 할 것들을 제 자리에 놓으니 이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행복을 누리고 있답니다. 미라클 모닝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