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깃발 꽂는 놈이 임자다

예능 전쟁터 25년 참전기 13

by 박지아피디

● 먼저 깃발을 꽂는 놈이 임자다

낮에 토크쇼를 한다고?


2005년 가을이 왔다. 제작사랍시고 차려놓고 5개월 동안 사장 놀이를 실컷 하다 보니 슬금슬금 돈이 떨어졌다. 벌어도 시원찮을 판에 곶감 빼먹듯 모아 둔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옛말에 <노느니 장독 깬다> 했다. 일하면 시간 없어서 돈을 쓸 틈이 없는데 노니까 돈 쓸 일만 더 늘어났다. 이제 정신을 좀 차려야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살짝 걱정이란 것을 하려는 즈음 좋은 정보가 내 귀에 캔디처럼 꽂혔다.

방송국들이 낮 시간대에 방송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낮에 몇 시간 방송 송출을 쉬는 타임이 있었다. 엄마 아빠가 조상님 제사를 하도 정성스럽게 모셔서 그런가? 나는 타이밍에 관한 한 억세게 운이 좋은 것 같다. 대학 졸업하고 빈둥대는데 케이블 방송국이 생겼고 자발적 퇴사를 하고 빈둥대는 데 대한민국 방송국이 낮에 방송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도 해치지 않고 방송국에 무혈입성할 수 있는 새 땅의 분양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번엔 골드러시에 서부를 향해 떠나는 총잡이가 된 심정이었다. 웬만하면 먼저 잡는 놈이 임자가 되는 황금 같은 찬스였다. 빨리 달려가서 깃발을 꽂아야 한다.


낮에 가볍게 할 수 있는 토크쇼 아이템들을 엄청나게 많이 연구했다. 어디 이 기획서에서 제시한 아이템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한번 찾아봐라 하는 심정이었다. 온갖 아이디어를 총망라해서 논문인가 할 만한 기획서를 작성했다.


기획서는 자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찾아가야 하는 담당자였다. 눈에 흙이 들어와도 박지아 피디는 SBS 일을 못하게 한다 하셨던 분이다. 왜냐하면 SBS와의 시청률 전쟁에서 내가 늘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를 생각해 보자. 조조가 가장 없애고 싶은 상대는 관우였다. 동시에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이도 관우였다. 나는 이미 KBS와 빠이빠이를 했다. 그분도 소문을 들으셨으리라. 이길 수 없는 강한 적은 내편으로 만들어라 라는 대사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학점 2.3으로 졸업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사학과 출신이다.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 베스트셀러인 삼국지를 교훈 삼아 조조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기획서를 들고 그분을 찾아갔다. 나 역시 그분의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 여성 차장님이신데 과학적이고 치밀한 시청률 분석을 통해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외주 프로그램을 항상 탑 랭킹에 올려놓는 분이셨다.


결전의 그날. 목동 SBS 사옥 앞.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빌딩 건물에 촤라락 하고 불이 들어왔다. 가로등도 일제히 켜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환영의 불빛이 밝혀지는 것 같았다. 새 땅에서의 일들이 다 잘 풀릴 거라는 하늘의 사인을 받은 듯했다.

차장님은 무덤덤하게 나를 맞으셨다. 그러나 결론부터 스포 하자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받아주겠다던 나는 후에 그분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서로와 같이하면 정말 치열하게 일할 것이고 그 결과는 너무나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툼한 기획서는 그냥 후루룩 넘겨보셨다. 이런 거 안 봐도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 사람인지는 내 진즉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진정한 프로를 만난 것 같은 짜릿함이 있었다. 한눈에 반한 남자를 만났을 때 저 끝까지의 미래가 머릿속에 광속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1주일 만에 모든 것이 신속하게 결판났다. 최초 낮방송 프로그램 주 5일 데일리 토크쇼에서 주 2회 제작을 맡게 되었다. 나는 적토마를 받은 것이다. 이 적토마를 타고 또 다른 전장으로 출격했다. <김미화의 U> 이것은 내가 제작자이자 연출자로서 맡은 최초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랄랄라 온]이라는 발칙한 이름을 방송 후반 스크롤에 올리게 되면서 나는 SBS 새 땅에 깃발을 꽂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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