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예능의 피

예능 전쟁터 25년 참전기 3

by 박지아피디

이상한 가족에게 물려받은

예능의 피 - 날라리 가족


박지아 외동딸~ 경상북도 북대구 엄마 남편 박광석 그는 내 아빠(띵동~)

영화 <기생충>을 봤을 때 나는 그 두 가족 모두에게서 나의 가족을 보았다. 우리 집으로 말하자면 어렸을 때는 송강호 가족처럼 고등학생 이후부터는 이선균 가족처럼 살았다.


외할머니와 아빠가 돌아가신 현재는 영화 기생충의 두 가족을 짬뽕해 놓은 것보다 더 진화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아니 있다면 저쪽 먼 나라 스웨덴과 이쪽 가까운 나라 일본의 그 무엇들을 섞어 놓은 독특한 가계 구조로 살고 있다.


나는 대체로 남들과 다른 사고와 행동들을 많이 하는 편이다. 또한 지구력 없기는 세계챔피언이다. 작심삼일만 40년 넘게 지구력 있게 하는 중이다. 그러한 내가 어째서 예능이란 한 가지 일을 25년 동안이나 하고 있는지 설명하려면 가족의 뿌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가족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중이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는 정말 미남이셨다. 젊었을 땐 신성일 님과 거의 흡사한 외모였다. 아빠랑 어디 둘이서 물건을 사러 갈 때면 아빠에게 윙크를 하거나 몸을 배시시 꼬는 여자 점원을 자주 보곤 했다. 나는 그때 본능적으로 배웠다.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는 윙크를 하거나 몸을 배시시 꼬아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인물값 한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그렇다 아빠는 인물값을 하셨다. 여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양장점을 운영하시던 엄마의 가장 아끼는 미싱 언니야까지도 유부남인 아빠에게 목을 다. 그래서 그 미싱 언니야에게 목을 매던 재단사 총각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했다.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법제도 따위의 허들은 가볍게 뛰어넘는 연애 도사 아빠를 보면서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헤어지지 않던 엄마를 보면서 계속해서 제도나 관습 따위 시큰둥하게 여기는 어린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불같은 감정들은 넘실대는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반드시 내려오고 타올랐다가는 이내 식어버렸다.


인간의 감정이란 서핑을 즐기듯 다뤄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게 해 준 아빠에게 무한 감사를 드린다. 다만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파헤치는 막장드라마에 사람들이 환호할 때마다 우리 집 이야기보다 재미가 없어 흥미롭게 보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하지만 반전은 아빠의 성격이다. 신성일 같은 외모와 다르게 성격은 넘버 쓰리의 송강호 같은 캐릭터였다. 몇 가지 콤플렉스에 의한 방어적인 경상도 스타일 허세와 내면에 감춰진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5:5로 정확히 분배되어있는 바람에 그 자신의 언과 행이 언제나 불일치한다는 것을 평생 인지하지 못하고 가셨다.


아빠의 언행불일치는 늘 우리 형제들의 유머 거리였다. 특히 엄마와의 대화는 정말 너무 해학적이라 20세기 경상도 어록 기록보관실이라도 만들어서 보관하고 싶을 지경이다.


경상도 방언은 예나 지금이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나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방언이다. 지금은 눈물을 머금고 추억으로 삼아야 하는 <개그콘서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일 때가 있었다. 공영방송 KBS가 전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일요일의 마감을 알리는 프로그램. 웃기고도 슬픈(개콘이 끝나갈 즈음 월요병이 도진다는 전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의 감정상태) 그 프로그램의 광팬으로서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코너는 <사투리 사전>과 <대화가 필요해>였다.


<사투리 사전> 코너에서 박성호가 담당했던 경상도요~ 하는 부분. “내 아를 나아도-청혼의 말”, “오다 줐었다-선물 줄 때”, “쥐 잡아 묵었나?- 아내가 빨간 립스틱을 발랐을 때”, “아는? 밥도! 자자!” 등 항상 집에서 듣던 1 형식 2 형식 3 형식의 함축적인 말들이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너무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경상도 4인 가족 식사 풍경을 묘사한 <대화가 필요해>는 마치 우리 집을 훔쳐본 것 같았다. 엄마가 찌개를 끓여 놓고 맛있냐는 의문형 질문에 아빠는 “간장 하고 새우젓 좀 가와 바라”라는 명령형 답변을 하셨다. 어쩌다 음식이 맛있다고 느껴질 때조차 “오늘은 느그 엄마 실수함 했네”라고 반어법을 구사하셨다. 경상도 언어에는 정말 해학이 있다.


진심을 말하면 죽는 줄 아는 경상도식 말장난 같은 대화법을 일찍이 연마하는 바람에 후에 예능 피디가 되고 나서 자막을 쓸 때도 어떡하던 반어법 도치법 강조법 회피 법 비꼬는 법 등등을 골고루 섞어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점도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 주신 엄마 아빠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물론 친구들 선후배에게도 항상 죽자고 농담을 구사해 욕을 먹는 점은 아쉽다.


나의 가족은 외할머니, 엄마, 아빠, 지들 둘이 쌍둥이인 남동생들 그리고 눈에 넣으면 아픈 외동딸이며 살림 밑천이라는 장녀인 나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희한하게도 나는 내 동생이 하나 더 있으며 게다가 그 둘은 쌍둥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알았다. 어느 날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알아주는 부자 동네 으리으리한 양옥집으로 데려가셨다. 거기에는

앗!!! 어떤 나이 좀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와 내 동생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있었다.


엄마 아빠 둘 다 20대 초반 언저리 나이에 눈이 맞아 나부터 낳고 보니 또 바로 임신이 되었다. 연년생인 둘째를 낳아보니 어이없게도 쌍둥이였다. 지지리 가난했던 엄마 아빠는 세 자식들을 뿔뿔이 여기저기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 첫째 동생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잣집 큰어머니 손에 보내졌다. 우리들은 서로 존재와 생사를 모른 채 10여 년을 보냈다.


따라서 나는 가족이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집단이라는 것을 몸소 체득하며 자랐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려 할 때 나를 먼저 데리고 왔고 더욱 형편이 나아지려 할 때 우리 형제들의 어설픈 상견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내게는 어떤 정형이란 것들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기에 나의 가족 형태가 남다르다 그래서 불행하구나 뭐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고 해맑게 자랐다. 우리 집이 많이 특이하다는 것은 고등학생쯤 됐을 때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나는 남동생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기쁘지는 않았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형제자매 중에 여자라는 인간에게 가장 덜 필요한 존재가 남동생이 아니던가? 오빠 언니는 나름 인생 선배로서 이끌어주고 여동생은 같은 여자로서 나중에 친구같이 지낼 수 있는 각각의 고유한 특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바로 한 살 아래의 똑같이 생긴 두 명의 남동생들은 과연 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그들이 쌍둥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각각 따로 배우는 각종 남자 어린이 기본 교양 운동들의 연습 희생양이었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 검도 복싱 등등의 기술을 나를 데리고 연마했다. 싸대기 발차기 엎어치기 목조르기 등을 당하면서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내 딸에게 다른 건 해줄 수 없어도 적어도 남동생 없는 인생은 살게 해 주겠노라고. 딸을 낳는 순간 남동생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출산을 중단했다. 어릴 적 나에게 했던 그 약속은 지켜냈다. 인류애를 총동원해 남동생들의 역할이 굳이 있다고 친다면 엄마 아빠의 언행불일치에 대해 같이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주는 동원 방청객쯤이다.


쌍둥이 중에 첫째는 외대 체코어과를 졸업하고는 생뚱맞게 조무래기들에게 정작 미국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상도 억양의 영어를 가르친다. 막내는 재즈 뮤지션이다. 가난하다. 방황한다. 음악을 만든다. 더욱 가난해진다.


가족이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가족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했던 자유분방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25년간 이어온 나의 천직을 만난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물려준 필살의 야생성 때문에 나의 천직을 만나서 그 직업을 평생 사랑하며 해낼 수 있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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