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는 꼴찌 면접은 일등
예능 전쟁터 25년 참전기 4
● 황당한 PD 합격기
서류는 꼴찌 면접은 일등
드라마 채널 공채 1기로
PD 되다
대학교를 우스운 성적으로 졸업한 나는 딱히 미래에 대한 목표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 특히 갑자기 매우 잘살게 된 전형적인 경상도 가정인 우리 집 분위기는 이러했다.
서울대 연대 고대를 보내면 여자애가 똑똑하고 세져서 좋은데 시집을 못 간다. -하지만 이미 난 어릴 적부터 세고 똑똑했다.- 따라서 여자애는 공부를 잘해도 그러한 학교에 보내면 안 되고 시집가기 딱 좋은 이대를 보내야 한다는 20세기 발상을 하셨다.
지금까지의 양육과 또한 대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풍부히 대 주실 것이 너무도 분명한 부모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은 자식 된 도리라 생각한 나는 그 뜻을 따랐다. 학과는 엄마가 정하셨다. 내가 중고등학생 때 역사 선생님들을 좋아했다는 이유로 나는 사학과에 1등으로 원서접수를 한 사람이 되었다.
이대를 보내는 것으로 교육은 끝났다고 생각하신 부모님은 초중고 때보다도 더 나의 성적에 신경 쓰지 않으셨다. 나는 부모님의 무신경을 쓸데없이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똑똑했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나는 부모님의 뜻을 잘 따르는 효녀였다.
성적보다는 오히려 나의 외모관리에 신경을 더 쓰시는 엄마 덕분에 나는 이미 대학생 때 그 유명한 명동 마샬 미장원에 다녔다. 명동 마샬 미용실이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의 수많은 미스코리아를 배출한 그래서 원장님께 감사드린다는 유행어를 만든 미인의 산실 아닌가? 나는 그곳에서 미스코리아 출신들과 나란히 누워 팔다리에 피멍이 들며 비싸디 비싼 경락 마사지를 받았다.
중학교를 들어갈 무렵부터 아빠의 섬유공장이 불붙듯이 잘되었고 재테크의 여왕인 엄마마저 준 의상실을 때려치우시고 아빠 사업에 합류해 우리 집은 몇 년 만에 순식간에 대구 손꼽히는 부자 안에 들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경제 성장과 수출 붐에 힘입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산업의 역군이 된 우리 집은 가진 건 그야말로 돈밖에 없는 집이 되었다.
따라서 엄마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나의 미모 향상을 위해 쏟아부으셨다. 그럼에도 들인 돈에 비해 나의 미모는 그다지 눈부신 발전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비싼 명품 옷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노는 수준이 높다 보니 3학년 정도 되어서는 촌스러운 경상도 가시나 땟국물은 벗고 어느 정도 이대생 티가 나는 수준으로는 발전했다. 1학년 2학년 때에는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주말이고 방학이고 대구에 조르르 달려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놀았다.
하지만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빚어낸 딸년 촌티 벗기기 2개년 계획에 성공한 3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유흥과 연애에 매진하며 3년 정도의 매우 짧은 리즈 시절을 누렸다. 전도유망한 21세기 인재가 되자는 목표보다는 시집가기 전에 실컷 놀아놔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배운 음주가무 영재교육 덕분에 나는 그야말로 날라리 대학생이었다.
해외 자유화를 누리는 첫 세대로서 학과 과제들을 나를 추종하는 서울대생 무리들에게 모두 맡기고 유럽 배낭여행 미국 어학연수 등을 다니며 엄마 아빠의 넉넉한 기둥뿌리를 뽑고 다녔다.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졸업 성적이 형편없었다>는 결론을 말하기 위함이다. 간신히 졸업을 하고 그 누군가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시집가기 위해 여전히 빈둥대고 있던 94년 가을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정말 생뚱맞은 얘기를 하셨다. 케이블 TV 드라마 채널 개국 PD 공채 시험이 있으니 응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올해 사주에 내가 시험이란 시험은 치는 족족 합격한다는 것과 내가 평소에 TV 드라마를 매우 즐겨본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근거 있고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분명한 명분을 얻게 된 나는 몽고인 시력보다도 안 좋은 2.3의 평점을 가지고 그 어렵다는 드라마 피디 공채 시험에 당당히 응시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가정의 황제였던 아빠의 뜻에 따라 나를 이대에 보내고 시집이나 잘 가라 하셨지만 내심 자신을 대신해 딸이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 신문광고를 보고 엄마의 동물적인 육감으로 촉으로 나에게 딱 어울릴만한 일터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아빠는 그냥 시집가기 전에 취미로 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신 것 같다.
엄마 아빠는 13명의 드라마 PD를 뽑는데 6500명의 지원자가 몰려 5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함에 괘념치 않으셨다. 나도 부모님의 의중에 발맞춰 나머지 6천 몇 백 명의 대한민국 유수의 인재들이 내 경쟁자가 안 된다는 듯이 당당히 C 학점 이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잘 없는 질 낮은 성적표와 10만 원어치의 주식 매입증을 내놓았다.
그렇다. 그 회사는 최초의 드라마 및 교양 프로그램 외주제작사로서 다른 케이블 TV가 대기업들이 설립하는 것과는 달리 중소기업우대 정책에 따라 선정된 유일한 외주 제작사가 설립한 케이블 채널이었다. 대표님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드라마 감독님이셨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한 방송국이라 많은 연기자들과 심지어 1차 서류 전형 합격이라는 보상으로 응시자들에게 주식을 사게 했다. 부모님은 10만 원의 주식을 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셨다. 나의 몽고인 시력보다 안 좋은 성적은 10만 원어치의 주식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2차 면접 3차 최종 면접이 남았다. 2차 면접은 사실 면접 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고 들어가서 그냥 넉넉한 가정형편을 말했다. 부모님은 투자 가치가 매우 높은 좋은 주식을 사는 건 당연하고 합격하면 더 많이 사놔야 한다 하셨다고 면접관들에게 전해드렸다. 나도 모르게 지원자에게 주식을 파는데 대한 엄청난 정당성을 부여해 드린 것이다.
고개를 매우 크게 끄덕이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대표이자 유명하신 드라마 감독님이셨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는 외모적으로 피디라는 직업이 어울린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나는 드라마를 매우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나머지 면접관님들도 고개를 같이 매우 끄덕이셨다. 당시에 없던 LTE급으로 2차 면접 합격 전화가 왔다. 막상 2차 면접에 붙고 나니 없던 욕심이 생기면서 비로소 내가 엄청난 자격미달자라는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자기소개서라는 걸 생애 최초로 써보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방송국의 앞날을 밝게 밝힐 푸른 신호등이다. 나는 여자지만 매우 똑똑해서 열 남자 부럽지 않을 인재가 될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엄청 밀어주신다 등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끄적거린 종이를 들고 3차 최종면접을 갔다. 내 옆에는 KBS 드라마 10년 차 FD, 유명 광고대행사 오리콤 차장, 일본 드라마 센터에서 유학한 서울대생 그리고 미국 어디 대학 신문방송학과 유학생까지 이런 자리 아니면 내 평생 옆자리에 앉아 볼 일 없는 인재 중에 인재들이 앉아있었다.
나머지 네 명에게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많이 했다. 나에게는 이름과 출신 대학 학과 등 관등성명 정도 확인하고 나가도 좋다고 했다. 당황했다. 그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끄적인 말들을 마구 마구 빠르게 읽었다. 웃으며 그만 됐다고 허둥대는 나를 매너 있게 밀어내셨다. 나는 당연히 떨어졌다고 여기고 그날 저녁 친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5G급으로 합격 전화가 왔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내가 대표님을 가장 만족시킨 1등 합격자였다. 나는 우리 사주에 대한 강한 긍정의 멘트로 인해 이미 2차 면접 때 제일 먼저 최종 합격자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