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지수 Mar 17. 2022

추억의 습작

Mar 17, 2022 / 추억을 간직하는 방법에 대하여

"아빠! 아빠는 나이 들어가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없어요?" 


운동 후 샤워를 마치고 얼굴에 바른 에센스가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는데 거실에서 들리는 딸아이의 목소리다. 순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질문이라 나도 모르게 '얼음'하고 멈췄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역시나 상냥한 딸바보 남편이다. 

"그냥요. 문득, 아빠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두렵지 않을까 싶어서요." 시크하고 쿨한 딸이다. 


"아빤 나이 들어간다는 게 두렵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냥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고, 나이 들어가면서 조급해지기보단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젊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좋은 부분들이 더 커진다고 할까? (중략)"


남편과 다르게 내 머리는 지진이 났다. '쟤가 왜 저런 질문을 하지? 무슨 고민 있나? 고 3이라 정서적으로 힘든 건가? 공부하다 말고 웬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서진아!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진 거야? 무슨 일 있어?" 역시, 나다. 참을 걸 그랬다.


"엄마는 말이야. 나이 들어서 두렵다기보다, 예전의 좋았던 순간들이 흑백사진처럼 사려져 가는 거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거 같아. 네가 어렸을 때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두려움보다는 슬픔? 안타까움? 후회? 이런 감정들이 더 생기는 거 같아."

그냥 질문했다, 됐다고 하는 딸아이 뒤통수에다 대고 나 혼자 뱉어 냈다. 그래도 딸아이는 내 말에 급 공감하는 눈치다. 표현은 시크했지만. 


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추억이 된다. 그냥 흘러간다. 잡을 수 없다. 거기다 사람의 뇌는 점점 쇠퇴해간다. 기억력도 또록해지기 보다 흐릿해진다. 이대로 두면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린 사진을 찍는다.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그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추억을 꺼내보기 위해 찾아본다. 그럴 때마다 아쉬움이 있다. 그 상황과 있었던 일들이 가물거린다. 잘 기억이 안 난다. 대충 이랬었지 하고 퍼즐을 맞춘다. 이내 답답해져 온다. 좀 기록해둘걸..... 


예전의 추억을 간직하고 고스란히 남기는 방법은 써야 한다. 기록해서 저장해두어야 한다. 머리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방금 전에 한 일조차 잊을 때가 많은데 행복하고 좋았던 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추억을 습작으로 남겨야 한다. 거창하게 작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기록하기가 어려워진다. 간단하게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하고 기록하고 저장해두면 그만이다.   


딸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기록했던 '마주이야기'라는 수첩을 꺼냈다. 아이와 엄마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을 기록하는 수첩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엄마의 숙제 같았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수첩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수첩을 열어서 읽는 내내 웃기도 하고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결국 눈물이 흐른다. 2008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아쉬움과 그때의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렁인다. 


나는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다이어리를 작성하고 메모하는 습관이다. 거창하게 길게 쓰는 게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를 적는다. 종이에 적었던 것이 쌓여, 2013년부터는 캘린더에 기록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노트북과 핸드폰에 연동해서 쓴다. 언제 어디서나 사용이 쉽다. 어디서라도 꺼내볼 수 있다. 여기저기 여러 곳에 쓰지 않고 한 곳에만 쓴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한다. 너무 세세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촘촘하게 쪼개서 쓰지 않아도 된다. 시간 단위 또는 모먼트의 흐름 단위로 기록한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그걸 쓰는 게 오히려 일이 되지 않나요? 해보려고 해도 플래너를 쓰는 것 자체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요."

한 시간마다 쓰지 않아도 된다. 이동 중에,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중에, 잠깐 틈이 났을 때 기록하면 된다. 그리고 오전, 오후, 자기 전에 잠깐 짬을 내서 기록하면 된다. 이것도 다 추억의 순간들을 담고 기억하는 습작이 된다. 길 게 쓰고 싶은 순간과 기억이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여유 있는 곳에 기록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에버노트를 사용하고 있다. 에버노트는 2011년 12월에 시작했다. 그곳엔 나만의 추억을 담는 습작 노트북이 있다. 그곳에 기록하고 싶은 순간을 담는다. 


왜 메모하고 기록하는 걸까? 


무엇보다 매 순간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감사하게 살 수 있게 한다. 순간과 추억을 차곡차곡 쌓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은 거다. 조선왕조실록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일상을, 나의 사실을, 나의 추억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싶은 거다. 나의 실록인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지난번 여행 갔을 때 어디를 갔지? 뭐 먹었더라?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거다. 


어떤 순간은 기록하고 쓰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고 힐링이 된다. 스트레스가 풀린다. 쓰는 순간 내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어지러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 삶을 제대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고, 성장의 기회가 된다. 


구본형 작가님의 글귀가 기억에 남는다. 

'나를 찾아 다 쓰고 가라'










작가의 이전글 나의 '설렘'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