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미루 밑 아리에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취준으로 심신이 허약했을 때
취준으로 심신이 허약했을 때 취준으로 인해 심신이 허약해진 상태였다. 힐링을 얻을 목적으로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봤다.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그 중에서도 <마루 밑 아리에티>를 택한 건 이 영화는 나를 상처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심신이 허약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영화를 보면 도리어 그게 어딘가에 걸려 체하고 만다.)
그리고 그 확신은 맞았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너무나 다정한 영화였다. 그 다정함들을 보며 위로를 참 많이 받았다.
실망보다는 위로를 먼저 건네는
일단 내가 가장 크게 느꼈던 다정함은 아리에티가 아빠를 따라 인간의 물건을 처음으로 '빌려오는' 때였다.
부녀를 배웅하던 중 엄마는 필요한 물건들을 말하며 기대에 들뜬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벌써 마음이 아팠다. 소설이든 영화든 어떤 스토리가 전개 되려면, 등장인물의 욕구가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아리에티는 쇼우에게 들키게 돼 엄마가 기대했던 티슈도, 각설탕도 못 가져가게 된다.
부녀가 티슈와 각설탕을 가져오길 그렇게 기대를 했던 엄마였는데, 못 가져왔다는 부녀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나는 엄마가 아리에티를 혼내지는 않아도, 최소한 '실망이다' '아쉽다' 표현은 할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 약간 멍해졌다.
장녀인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을 실망시킬 까봐 걱정하고, 미리 마음 아파하느라 지새운 밤들이 정말 많았다. 아리에티의 엄마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리에티에게 묻지도 않고, 네가 뭘 잘못했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아리에티는 이미 자신의 실수로 각설탕을 잃어버리고 온 데 크게 상심한 게 눈에 보였다. 그런 아리에티에게 엄마가 그저 무사히 돌아온 걸로 됐다고 해주는 걸 보며 내가 다 위로를 받았다. 웃프게도(?) K-취준생 생활을 하니까 이런 것만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생각도 했다.
물론 다정함이 폭력이 될 때도 있지만
영화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다정함으로 스토리를 이어나간다. 아리에티가 발견할 수 있는 곳에 각설탕과 꽃을 두는 쇼우의 다정함, 아버지를 구해준 스피라의 다정함, 그런 스피라에게 차를 내어주는 모녀의 다정함, 아리에티에게 모습을 봐도 되겠냐고 묻는 쇼우의 다정함, 자신 때문에 이사하게 되었다며 슬퍼하는 아리에티에게 한 번도 아리에티를 타박하지 않는 부모님의 다정함, 아리에티의 위치를 알려준 고양이의 다정함 덕에 쇼우와 아리에티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게 된다.
물론 이 영화에서 쇼우의 다정함이 시혜적인 태도에서 나올 때(아리에티의 집 부엌을 뜯어가고 새 부엌을 설치해주는 행동) 폭력적이게 될 수 있는 점을 짚어준 것도 의미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쇼우가 그런 실수를 한번 했다 해서 영화는 쇼우를 함부로 단죄하지 않는다. 영화는 여전히 쇼우를 아리에티의 조력자로 행동하게 한다. 끝에서는 쇼우와 아리에티는 깊게 교류하고,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미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다정함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는 '다정함' 그 자체다, 라는 생각도 했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도입에서 특히 매력적이었던 건 소인들의 삶을 엿보는 재미였다. 소인들은 평소 다니는 경로가 어떻게 되는지, 그들이 어떤 소품들을 쓰는지, 평소 부엌의 풍경은 어떤지...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수많은 디테일들이 창작자의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들이 소인이 될 일은 없을 텐데. 내가 절대 될 일이 없는, 벽 너머 같은 존재인 완벽한 '타자'를 상상하고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상상했다는 것.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모하다'의 '사'자가 '생각할 사' 한자인 이유도 그 때문일 거라고. <마루 밑 아리에티> 제작자들은 소인들의 삶을 진지하게 궁금해하고, 그들의 세상을 끊임없이 생각했기에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다정함과 사랑이 작품을 태어나게 한 거나 다름없다 느꼈다.
생각해보면 내가 힘들었던 시기인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나를 지탱해 주었던 건 수많은 다정함들 덕분이었다. 그 다정함들에 기대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달의 숫자가 '2'가 되어 있었다. 2022년의 1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걸 보며, 2022년 남은 달들도 분명 잘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소박해도, 어떨 땐 큰 위로가 되는
영화가 끝나고 평을 찾아보니 소재에 비해 시나리오가 너무 소소하고 시시하다는 평이 주였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난 사실 이 영화에서 최소한 쥐들과 아리에티 가족들이 싸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디테일과 작은 것들이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최근에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너무 작은 거에 집착해. 더 큰 거를 봐! 하지만 어떨 땐 작은 것이 더 큰 웃음을 줄 수 있다. 왜 작은 것은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것까지 소중히 여길 줄 안다면, 삶은 더욱 아껴야할 것이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2022년 취준을 하는 내가 아니라 대학생인 내가 봤으면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한창 영화 시나리오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던 시절의 나였으면, 갈등이 적고, 메인 플롯이 어쩌구 저쩌구..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의 내가 보니까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다정함들에 위로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모든 순간 순간은 이래서 소중하구나. 비록 지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서 '지금' 이 영화를 봤을 때 이런 감동, 울림을 느낄 수 있는 거구나 하고. 힘든 순간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의 감동을 주는 역할에서 OST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의 OST가 너무 좋다......
ost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때로는 Happy, 때로는 Blue, / 기쁨과 슬픔은 항상 섞여가 아리에티의 노래의 가사처럼 인생은 매일이 행복할 수만도 없고, 다행히 늘 불행할 리도 없다. 어제의 나는 이유 없이 너무 우울했는데, 잠을 자고 오늘 일어나보니 애정하는 지인에게 마음 담긴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고통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다정함이고, 행복한 일을 지탱해주는 것도 다정함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다정함 덕에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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