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믿으며 지금의 아이들을 대하는지
회사에 12시간을 있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그 행운아가 바로 나다.
칼퇴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업 자체가 저녁 6시 반에 끝난다 해도, 애들 첨삭 봐주고 뒷정리 하다보면 7시. 부랴부랴 어머님들께 보낼 피드백을 정리하고, 아이들이 쓴 논설문을 홈페이지에 스캔해 업로드하다보면 8시가 되어 있다. 오전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8시까지 학원을 가니(*이 글을 쓸 당시엔 방학 기간부터 근무를 해서 오전 특강을 맡았습니다) 오전 8시부터 ~ 저녁 8시까지 12시간을 체류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일 자체가 나에게 전혀 스트레스가 없고, 너무 재미 있어서 힘든 줄 모르겠다.
일이 재미있는 이유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아이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게 즐겁다, 아이들의 각기 다른 개성이 뚜렷한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는 게 기쁘다,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것들을 전해줄 수 있어 행복하다. 물론 내가 맡은 아이들은 저학년이라 의자에 한번 앉히는데 애를 쓰게 되고 그렇게 겨우겨우 앉혀놓아도 내가 잠시 다른 아이를 보러 간 사이 멋대로 자리를 이탈해 나를 지치게도 하지만. 답안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퀴즈를 채점하면서도 틈틈이 한 명 한 명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해주느라 내 입은 쉴 새가 없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지하철을 타고 퇴근할 때였다. 슬그머니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 하나가 있었다. 어릴 때 나도 논술학원을 다녔다. '학원'이라면 치를 떠는 나였지만, 그 당시의 내가 유일하게 정말 가기를 고대했던 학원이었다. 그 학원 선생님이 나를 정말 예뻐해주고 사랑을 담뿍 주신 게 기억이 났다. 얼마나 나를 예뻐하셨냐면, 나에게 '검정 머리 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실 정도였다.
수다쟁이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은근 허당인 내가 빨간머리앤과 똑 닮았다며 지어준 별명이었다. 나는 그 애칭에 담긴 선생님의 사랑에 이번에 새삼 감탄했다. 관심을 그렇게나 받고 싶어했던 어렸을 때의 나였다면 정말 말이 많은 학생이었을 거다. 얼마나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선생님을 진땀빼게 했을까?
하지만 내 기억 속 선생님께서 내게 화를 내신 기억은 전혀 없다. 내 서툰 생각도 인내심 있게 끝까지 들어주시고 존중해주시는 분이었다. 늘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셨던 시선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런 신뢰가 구축된 관계였기 때문에 나는 수업 때 더 떠들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허당인 나에게 '검은 머리 앤'이라는 사랑스러운 별명을 붙여주시다니!
그 별명을 붙여주셔서 감사한 게,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나 스스로를 성인ADHD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실수가 잦았다. 하지만 어떤 날은 '검정 머리 앤'이라는 별명이 떠오르면서, '빨간 머리 앤은 나보다 실수를 더했는 걸, 그러니 괜찮아' 라던가 '나는 검정 머리 앤이니까 이정도 실수는 할 수 있지'하고 넘어가기도 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부족한 점을 오히려 사랑스럽게 봐주고, 그걸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이 담긴 별명을 붙여주셨던 선생님이라니. 그 사랑 덕에, 나도 수다쟁이고 공상을 심하게 하고 너무 허당인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일한지 이제 이주 남짓, 가끔 아이들은 내게 예상치 못한 말을 툭 꺼내 날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영어 못 한다고 엄마한테 혼났어요' '엄마가 너는 다 못해서 뭐가 될지 꿈을 꿀 수가 없대요' '엄마가 내가 뭐가 될지 모르겠대요'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만다. 아이를 복돋아줄 수 있는 말을 뭐라도 꺼내보려 하지만, 아직 초보 선생님이라 그런지 횡설수설만 하게 될 뿐이다.
'아냐 햇살아, 너는 정말 멋지고... 대단한 존재야!' 같은 진부한 말만 내뱉을 뿐이다. '검정 머리 앤'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선생님처럼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문예창작과를 나오게 된 건, 이 아이들에게 맞는 아름다운 별명들을 시를 짓는 마음으로 지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뒤로는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꼭 한번씩 물어본다. 햇살이는 꿈이 뭐야? 햇살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어떤 햇살이는 리듬체조 선수가 되고 싶다 했고, 어떤 햇살이는 발레리나가, 어떤 친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떤 햇살이는 아직 없다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리액션을 끌어 반응해준다.
와! 햇살이 리듬체조 하면 정말 잘 어울리겠다. 햇살이의 몸짓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네. 와 햇살아 발레리나가 되면 선생님 발레 꼭 가르쳐 줘야 해? 햇살이 작가가 되면 꼭 선생님한테 싸인해줘. 와 햇살아 그러면 너는 앞으로 뭐든 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한 뒤엔 꼭 새끼 손가락을 건다. 내가 너희의 꿈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에너지가 넘쳐서 엉덩이가 자주 들썩이는 장난꾸러기 햇살이는 꿈이 게임 유튜버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
햇살아 유튜버 하게 되면 선생님한테 유튜브 계정 알려줘. 선생님이 꼭 좋아요 구독 누를게.
그러자 햇살이는 씨익 웃으면서 짓궃게 말한다.
제가 유튜버 되면 선생님은 그때쯤 할머니 되어있을 것 같은데.
조금의 망설임 없이 나도 씨익 웃으면서 답해준다.
할머니 되어서도 햇살이 계정에 구독 좋아요 당연히 하지!
그 뒤에 일부러 목소리를 가늘게 내며 할머니 흉내를 낸다. "아이고오~ 우리 햇살이 영상 또 올라왔네. 좋아요 눌러야지이이~" 장난꾸러기 햇살이는 말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다.
오늘 햇살이와 이 대화를 나눈 게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생각났다. 미래에 내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햇살이의 유튜브를 보고 좋아요와 구독을 누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내 말과 눈빛과 행동으로 햇살이에게 전해졌으면 했다. 나는 정말 진심이라고. 햇살이가 유튜버가 되기만 한다면, 내가 몇살이든, 아무리 바쁘든,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자글자글 주름이 든 손으로 좋아요를 꼭 눌러줄 것이라고.
날 그렇게 사랑해주셨던 논술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어 내신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그 학원을 안 다니기 시작했다. 그 학원은 어느날 말도 없이 상가에서 자리를 뺐다. 날 그렇게 사랑해주셨는데, 선생님의 이름도 기억을 못하다니.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랑하는 이 아이들도 먼 미래에 내 이름을 기억도 못 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름이 없는 기억의 조각일지라도, 논술 선생님이 나에게 붙여준 사랑스러운 별명은 나에게 아직도 이리도 생생하니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이름이 필요 없을 정도의 것일지도. 아무튼 그걸 내가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 내가 받아 본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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