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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한 클래식 이야기

세상에 반기를 든 천재작곡가

18세기 중반 유럽은 절대 왕권주의였던 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 오던 시기였습니다. 계몽주의 와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자유, 권리 등의 가치가 점차 중요시 여겨졌고, 새롭게 부상한 시민 계급이 기존의 절대주의와 대립하며 균형을 맞추고 살아가던 시기 였지요.
일찍이 의식이 깨어 있던 일부의 계몽 군주들은 이러한 사회 변화를 받아들여, 뛰어난 철학가나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습니다. 또 한, 그것을 발판 삼아 더욱 발전적인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종교적인 경계선이 존재했습니다. 그 선을 벗 어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 렇다면 이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뛰어난 신동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아이에게 마귀가 들렸다고 믿으며 사회에서 배척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는 앞서 말한 시대와 달리, 신동 을 ‘이상한 아이’에서 누구나 원하는 ‘뛰어난 아이’로 인식하던 시기 에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신동이 새로운 아이콘으로 여겨지기도할 때였지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3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 기 시작한 모차르트. 그는 처음 듣는 곡을 그대로 악보에 옮기고 막 힘없이 악보를 읽으며 연주를 하기도 하는 등 놀라운 신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레오폴드 모차르트 Leopold Mozart 의 막내아들로, 음악이 늘 함께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 다. 그래서 3세부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5 세부터는 작곡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모차르 트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자신의 막내아들이 당대의 아이콘 이었던 ‘신동’이었으니 말이에요.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아들을 유럽에서 최고로 만들어야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세가 된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의 여러 궁정을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시작했지요. 모차르트가 고향인 오 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더 넓은 곳에서 성공하기를 바랐 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연주 여행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큰 밑거름이 되 었습니다.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고 당시 유행하는 음악 과 분위기를 모두 파악할 수도 있었지요. 그리고 유명 음악가들의 많 은 음악도 듣고 접할 수 있었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본 귀족들은 그에게 작품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을 위한 독 주곡들과 실내악, 교향곡, 오페라 등을 작곡하며 거의 모든 음악 장 르를 섭렵하게 되었지요. 그는 무려 교향곡 50개, 피아노협주곡 25 개, 바이올린 협주곡 7개, 바이올린 소타나 35개, 디베르티멘토 3개, 클라리넷 협주곡 1개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지오반니」, 「마 적」,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코지판투테」 등을 작곡하며 활발한 음 악 활동을 펼쳤답니다.
모차르트는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작곡가로 활동하 며,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래에서 음악가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대주 교와의 마찰이 끊이질 않았지요.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역량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노력했는데요. 독일의 만하임과 뮌헨, 프랑스의 파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쉽 지 않았습니다. 천재적인 작곡가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했다 니, 믿어지시나요? 아마도 모차르트의 음악적 역량이 너무나 뛰어 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 니면, 모차르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당시 음악가들은 왕실이나 귀족, 교회에 소속되거나, 그로부 터 후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음악가처럼 자신의 작품과 연주만으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지요. 당시 음악가는 궁정과 교회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어마어마한 음악적 감수성은 당시 신분 사회가 억압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래 서 결국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반기를 들며 일자리를 박차고 나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떠나게 되었지요. 하인의 신분을 탈피하고자 했던 그는 더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껏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펼치리라 마음먹습니다.
계몽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프리메이슨 의 회 원이었던 모차르트는 몇몇 귀족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감성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 만의 음악으로 당당하게 먹고살겠다!’ 다짐하며, 음악가로서 독립 선언을 하지요. 다시 말해, 최초로 프리랜서 선언을 한 것입니다.

빈에서 살게 된 모차르트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콘스탄체 Constanze 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지요.결혼을 다짐했을 당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집안에서는 모두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직 안정된 직업도 가지지 못했는데 무슨 결혼이냐?”라고 이야기했고, 콘스탄 체의 부모님 또한 “수입도 변변치 않게 음악이나 하는 한량인 것 같 은데?”라고 말하며 반대했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성공 합니다. 그리고 일 또한 잘 풀려 당당히 음악가로 인정받으며 살게 되지요. 모차르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의뢰받은 곡들을 작곡하며 충분한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부부의 씀씀이는 만만치 않았고, 두 사람은 늘 부족한 생활비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1791년, 모차르트는 그가 마지막으로 의뢰받은 작품인 레퀴 엠(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던 중, 고열과 오 한으로 몸져눕게 됩니다. 그리고 미쳐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자신의 레퀴엠을 작곡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반짝반짝 빛 나는 재능을 가진 작곡가 모차르트. 35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350 년 이상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 인류에게 크나큰 음악적 가치를 남 긴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을 보면, 당시 음악가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공동으로 치러졌고, 참석자 또한 가족과 친구들 몇명이 전부였지요. 게다가 장례식 당일 무척 심했던 눈보라 탓에, 부인을 비롯하여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식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탓에 지금까지도 모차르트가 정확하게 어디에 묻혀있는 지는 알 수가 없답니다. 비엔나 성마르크스 공동묘지에 그의 묘비가 있지만, 그 또한 근처 어디쯤 묻혔으리라 추정하고 세운 것이지요.
그의 음악을 들으면 기쁘면서 슬프기도 하고, 재미있으면서 무겁기도 하고, 밝으면서 어둡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집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면, 이 느낌이 바로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그의 삶이 융합되어 음악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저는 작곡가 모차르트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던 천재. 당시 최고의 권 력자( 잘츠부르크 대주교) 에게 반기를 들며, 자신의 삶을 찾았 던 용기 있는 남자.”
오늘날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참 많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지요. 어찌 보면, 프리랜서라는 삶은 모차르트로 인해 처음 시작된 것인데요.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경제적인 부분이 보장되지 않는 삶에 늘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 지만 프리랜서 음악가들 모두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꿋꿋이 이 시련을 이겨 나가고 있지요. 특히나 코로나19 시대가 도래한 요 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프리랜서 음악가들에게 진심을 담은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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