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와 결혼하고 천도복숭 구하여 주인 살린 머슴
한 사람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장성하여 관직에 있었다. 이 사람이 이제 늙어 거의 죽게 되어 아들들에게 천도복숭을 좀 구해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집에는 머슴이 하나 있었다. 머슴은 밥 먹을 때마다 나타나는 쥐에게 밥을 조금씩 떼어주었다. 머슴은 주인이 천도복숭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구해오겠다고 하였다. 머슴이 길을 가다가 샘에서 빨래하는 젊은 여자가 있기에 천도복숭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여자는 산을 넘어 가면 옥황상제 딸 삼형제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셋째 딸 옷을 감추고 자식을 셋 낳을 때까지 옷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머슴은 여자가 시킨 대로 가서 셋째 선녀의 옷을 감추었다. 셋째 선녀는 할 수 없이 머슴과 함께 살기로 하고 주문을 외워 기와집을 지었다. 선녀는 머슴과 살면서 아들 둘을 낳고 또 한 아이를 배고 있었다. 어느 비 오던 날 선녀가 이제 자기가 어딜 가겠느냐며 날개옷을 꺼내달라고 하였다. 머슴이 옷을 내주니 선녀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와집도 없어져 버렸다. 머슴은 빨래하던 여자를 다시 찾아갔다. 그 여자는 사실 산신령이었는데, 어째서 자기 말을 안 들었느냐며 타박을 하고는 선녀들이 목욕하던 그 샘에 가 있으면 하늘에서 쪽박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다. 선녀들이 이제는 샘에 내려오지 않고 쪽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목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걸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선녀를 만나라고 하였다. 선녀들은 물을 긷다 무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자 땅 신랑이 온다며 쪽박을 놓아 버렸다. 그런데 선녀의 아들들이 나중에 붕어 낚시를 하면서 쪽박을 달아 올려놓고 보니 쪽박 안에 아버지가 있었다. 선녀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먼저 부모님을 만나봐야 한다며, 그러려면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하였다. 선녀는 머슴에게 부모 집에 가서 장닭이 꾸꾸 하면 ‘아버님 보입시다’ 하고, 뒷문에 가서 암탉이 꾸꾸 하면 ‘어머님 보입시다’ 해야 하늘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머슴이 선녀가 시킨 대로 하니 장닭은 장인이 되고 암탉은 장모가 되어서는 땅 신랑이 이치를 잘 안다며 반겼다. 머슴은 이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장인이 사위 노릇하려면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하면서 뚝딱 방망이를 구해오라고 하였다. 남자가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몰라 끙끙 앓고 있자 부인이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면 큰 구멍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방망이를 꺼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뚝딱 방망이를 구해 나오면 언니들이 솔개가 되어 그걸 뺏으려고 할 텐데 방망이를 겨드랑이에 감추고 고개도 들지 말고 오라고 하였다. 머슴이 그 구멍을 찾아 들어가니 커다란 쥐가 남자의 눈을 칭칭 감고는 한 곳에 데리고 갔다. 어느 곳에 당도하여 눈가리개를 풀어주어 보니 큰 기와집인데 자신이 먹여 살렸던 커다란 쥐가 나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머슴이 뚝딱 방망이를 구하러 왔다고 하니, 커다란 쥐는 염려 말고 밥이나 먹고 있으라고 하고는 쥐들에게 명령을 하여 뚝딱 방망이를 찾아오게 하였다. 머슴이 구멍에서 기어 나와 말을 타고 가는데 솔개들이 막 덤벼들었다. 남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방망이를 겨드랑이에 꼭 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방망이는 두드리면서 밥 나오라 하면 밥 나오고, 돈 나오라 하면 돈이 나오는 것이었다. 하루는 장인이 머슴을 부르더니 또 내기를 하자며, 활을 쏠 테니 화살 두 개를 찾아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머슴이 집에 와서 또 고민을 하니, 선녀가 이번에도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 남대문 오른쪽에 하나 박혀 있을 것이고, 좀 가다 보면 송장이 하나 드러누워 있을 텐데 그 어깨를 들어보면 오른쪽에 하나가 박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머슴은 선녀가 시킨 대로 하여 화살 두 개를 찾아왔다. 장인은 이제 머슴을 진짜 사위로 인정하였다. 하루는 선녀가 꽃구경을 가자며 머슴을 데리고 꽃밭으로 갔다. 머슴이 한 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천도복숭이라는 것인데 사람이 죽게 생기면 먹이면 된다고 하였다. 또 다른 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으니 흰 꽃을 문지르면 살이 도로 되고 붉은 꽃을 문지르면 피가 돌아서 사람이 완전히 살아난다고 하였다. 머슴은 선녀 몰래 꽃을 따서 담아 놓고 땅에 있는 자기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였다. 선녀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며 머슴을 따라 땅에 내려왔다. 머슴이 집에 가보니 주인 영감이 죽어서 상여를 내가고 있었다. 머슴이 상여를 내려놓으라 하고 천도복숭을 먹이고 꽃을 문지르니 주인영감이 살아나게 되었다. 주인 영감은 자신의 살림을 반 나누어 머슴에게 주었고, 머슴은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 선녀과 함께 잘 살았다. [한국구비문학대계] 6-7, 56-63면, 장산면 설화17, 사람 살린 천도복숭, 김귀금(여, 55)
<나무꾼과 선녀> 같죠? 그런데 앞뒤로 꼭 <바리데기>에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가 덧붙어 있어요. 이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요. 의견들이 분분했거든요. 이걸 <나무꾼과 선녀>로 볼 수 있느냐, 이게 <바리데기>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우리끼리의 이론적인 토론이긴 했지만, 여러분들 보기엔 어떠세요? 일단 우리 결론은 어느 쪽도 아니다. 서사구조상 완전히 다른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다, 이렇게 봤어요.
<나무꾼과 선녀>가 되려면, 머슴이 선녀와 함께 사는 결말이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리데기>가 되려면, 버려진 딸이 아비를 살리는 내용이어야만 해요. 바리데기가 서천서역국까지 가는 여정과 무장승을 만나 아이를 낳고 약수를 구하는 과정이 이 이야기에서는 머슴이 선녀를 만나 사위시험을 치르고 천도복숭을 구하는 과정으로 바뀌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바리데기>와 <나무꾼과 선녀>의 결합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지요.
이야기가 결합되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떨 땐 참 경이롭게까지 느껴져요. 어제 얘기했던 <눈 뽑힌 동생>에는 원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두 개, 세 개, 네 개까지 덧붙어서 형성된 각편이 있어요. 원래 이야기에서 뭔가 부족하거나 수정하고 싶다고 느껴진 부분들에 다른 이야기의 서사를 결합시키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한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덧붙으면서 완성도를 높여가는 방식은 우리 삶을 꾸려갈 때 필요한 방편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우리는 무의식중에 어떤 서사를 염두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기에 뭔가 부족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원래의 서사를 완전히 바꾸기보다는 연관성 있는 다른 서사를 떠올려 이어붙이기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나 자신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어렵잖아요.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이잖아요.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보다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금씩 보완해 가는 것. 복합서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이야기와 삶의 논리입니다.